연극이 묻는다…우리가 외면한 세계의 진실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전 정보 미리 읽고 가지 마세요.” 서울시극단의 공식 SNS에선 연극 ‘키스’의 게시물을 올리며 이 한 줄의 문장을 덧붙였다. 구구한 설명들이 극의 묘미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칠레의 젊은 작가 기예르모 칼데론이 쓴 이 작품은 201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초연됐다. 창작진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그 어떤 힌트도 줘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서울시극단을 이끄는 고선웅 단장은 작품에 대해 “허를 찌르는 반전이 큰 충격을 안길 것”이라고 했다. “반전이라는 말을 써도 안되지만, 그조차 쓸 수 없다면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용했다”고 그는 귀띔했다. ‘반전’엔 여러 의미가 있다. ‘일의 형세가 뒤바뀐다’는 의미의 반전(反轉), ‘전쟁을 반대한다’는
2023.05.08 18:35‘돈키호테’의 영리한 재탄생…키트리 32회전 압권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추장스러운 갑옷과 부츠를 벗고, 백발의 수염은 떼버렸다. 기골이 장대한 ‘젊은’ 돈키호테가 마침내 날아올랐다. 나이가 들어 춤을 출 수 없었던 돈키호테는 그의 꿈 안에서 그토록 그리던 ‘환상 속 여인’ 둘시네아와 파드되를 춘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자 안무가인 송정빈이 재해석한 발레 ‘돈키호테’에서다.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4월 16일까지, 예술의전당)는 마침내 ‘돈키호테’다워졌다. 이 작품은 스페인 극작가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1869년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를 맡아 초연한 고전이다. 제목이 ‘돈키호테’였음에도 주인공은 돈키호테가 아니다. 돈키호테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된 춤 한 번 추지 못했고, 주인공마저 다른 사람에게 내준 조연에 불과했다. ‘꿈만 꾸던 영혼’이 ‘꿈 속에서&
2023.04.15 19:16평범한 사람들의 수호자, ‘너무도 인간적인’ 살리에리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신이시여,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헤라클레스에게 부여된 과제보다 어려우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 더욱 불길하다”고 했다. 살리에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신의 응답’을 구했기에, ‘그 어렵다’는 신탁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그의 삶은 어디로 향했을까.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 연극 ‘아마데우스’(4월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살리에리의 광기에 찬 독백으로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
2023.04.03 00:14짜릿하고 청량하다…다시 쓰는 여섯 왕비의 역사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우릴 모두 여섯 명의 전 부인으로 알지.” 이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한 남자의 ‘이름’ 뒤에 가려진 ‘전 부인’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다.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허스토리(Her story)’의 시작. 역사 속 주인공이 직접 쓰는 새로운 시대의 역사다. 시간은 500년 전 영국의 튜더 왕가로 되돌아간다. 헨리 8세에겐 출신도 제각각인 여섯 명의 왕비가 있었다. 두세 줄 짜리 역사로 기술한 여섯 왕비의 ‘사연 많은 삶’이 80분 짜리 팝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식스 더 뮤지컬’이다. 작품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동문인 20대 동갑내기 창작진 토비 말로와
2023.03.26 17:05정명훈·조성진, 마지막 포옹까지 완벽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미 열 번도 넘게 호흡을 맞춰본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무대. 오랜 인연, 그만큼의 시간의 길이가 빚어내는 조화로움은 유독 빛났다. 협연자 조성진과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세심히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 솔로의 연주 중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휘자 정명훈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만남’이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선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1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정명훈,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마지막 협연 무대가 관객과 만났다. 30여분의 화려한 협주곡은 한 눈 팔 새도 없이 흘러갔고, 협연을 마치자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립해 한국 클래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클래식 음악 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도
2023.03.06 10:01‘거대한 한국사’ 위에 꺼내놓는 수많은 질문들…연극 ‘빵야’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굳이 찾아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보관한 소품 창고. 낡은 영창 피아노 위, 멋스러운 세고비아 기타 옆으로 단단한 케이스에 담긴 장총 하나가 놓여있다. 이곳에 1945년생,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 ‘99식 소총’(99식 소총은 단총과 장총으로 나뉜다)이 살고 있다. 이름은 ‘빵야’. 78년의 기구한 삶에 비한다면 지나치게 귀여운 이름이다. 연극은 빵야와 드라마 작가 나나의 만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빵야의 대사) 총은 말을 한다. 한국 연극 사상 본적 없던 기이한 장면이다. 굴곡진 생을 보내온 장총을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앞세운 사람은 2016년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김은성 작가다. 2020년 극본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나 마침내 막을 올린 작품이 바로 연극 ‘빵야’(2월 26일까지, LG아트센
2023.02.17 13:46아찔한 서커스로 소환한 기억…기발한 상상력의 승리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오면, 대형 모니터로 ‘Recall’(리콜)이라는 단어가 뜬다. 숨 막히듯 째깍거리는 소리가 극장을 메우고, 하얀 무대 위로 남자는 뛰어오른다. 깜빡이는 조명에 맞춰 시계 소리 같기도 하고, 메트로놈 소리 같기도 한 기계음이 커지며 숨통을 조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무렵, 무대는 얼굴을 바꾼다. ‘밀당’이 제법이다. 등장부터 신선했다. 무대 아래에서 무용수들이 올라온다. 일곱 명 ‘완전체’가 되자, 피아노와 관악기가 버무려진 재즈풍 음악에 맞춰 나긋나긋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뮤지컬의 1막 ‘첫 번째 신’ 같은 인상적인 출발. 알록달록한 평상복을 입은 무용수들은 의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다 무대 오른쪽에 움푹 파인 구멍 안으로 뛰어든다. 다시 홀로 남겨진 남자는 무대 끝에 설치된 작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안무와
2023.02.02 10:36인생은 B와 D 사이의 C…뮤지컬 ‘이프 덴’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 때는 꿈이 있었다. 대학에선 제법 유능하고, 내일이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어떤 미래를 그려봤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분야에서 인정받고, 날개를 펴는 꿈. 그랬다면 10년 후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인생은 B(Birth, 탄생)과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다. 눈앞에 놓이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 앞에서 우리의 결정이 지금의 오늘과 미래를 결정한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아주 평범하다. ‘백마 탄 왕자’는 없다. 내면의 성장을 이루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역사적 인물’도 없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핍박받는 여성도 없다. 그러나 여성 서사물. 나이 39세, 성별 여(女), 이름 엘리자베스. 그의 삶이 이제 펼쳐진다. 뮤지컬 ‘이프 덴’이다.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작품엔 거대한 서사도,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건 사고도 없다. 평범한 일상 앞에 놓이는 고민
2023.01.24 17:31전미도의 잔혹하고 기괴한 맛 ‘스위니토드’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러빗부인(전미도)의 신이 난 검은 눈동자엔 장난기가 가득 들어찼다. ‘내용물도 부실하고 감동이 없는 소설가 파이’, ‘주둥이만 살아서 씹는 맛이 최고인 변호사 파이’, ‘꽉 막혔지만 실속 넘치는 안전빵 공무원 파이’, ‘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 정치인 파이’를 만들 생각에. 뮤지컬 ‘스위니토드’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토드와 러빗 부인의 ‘어 리틀 프리스트(A Little Priest)’다. 살벌하고 기괴한데, 웃음이 터지고야 만다. 씹고 뜯는 ‘풍자의 맛’이 기가 막혀서다. 무대 위 살인마들의 이야기처럼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어차피 “서로 잡아먹는 인간들”이니, 도축하듯 사람을 죽여 ‘인육파이’ 만들어 먹는 것쯤이야. 뮤지컬 &lsq
2023.01.16 07:01오랜만에 만난 패기…뉴욕필 수장의 서울시향 입성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앙코르로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작품번호 46 제8번’이 시작할 때였다. 굳이 몸을 많이 쓸 필요도 없었다. 무림의 경지에 오른 고수처럼 목만 까딱, 오른쪽 어깨만 살짝살짝, 왼손 끝만 착. 그 몸짓 하나하나에서 압도적 카리스마가 뚫고 나왔다. 마치 단원들에게 ‘그렇지, 그렇게 하는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오른손에 든 지휘봉으로 휘익 허공을 거르며 질주한다. 차기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낙점된 야프 판 츠베덴의 첫 연주회. 가로 세로 1m 남짓한 작은 포디움(podium, 지휘대)은 그의 음악으로 거대한 무대가 됐다. 지난 12~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선 야프 판 즈베던(63) 차기 음악감독의 데뷔 무대가 막을 올렸다. 예정보다 이른 등판이었다. 내년 1월부터 5년간의 임기를 시작하는 판 즈베던 감독의 첫 연주는 오는 7월이었다. 이날 연주는 오스모 벤스케 전 서울시향 음악감독
2023.01.15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