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일까지, 연극 ‘아마데우스’
살리에리의 시선으로 본 모차르트
문학적 대사 통한 불후의 명곡 분석
너무도 인간적인, 연민의 살리에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신이시여, 욕망을 갖게 하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헤라클레스에게 부여된 과제보다 어려우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 더욱 불길하다”고 했다.
살리에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신의 응답’을 구했기에, ‘그 어렵다’는 신탁도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자신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그의 삶은 어디로 향했을까.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 연극 ‘아마데우스’(4월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살리에리의 광기에 찬 독백으로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안았고, 모두가 꿈꾸는 자리에 올랐다. 이 음악가의 놀라운 재능 중 하나는 뛰어난 음악을 알아차리는 귀였다. 그 스스로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기에 가능했던 분별력이다.
연극은 모차르트를 향한 살리에리의 시선과 그의 삶을 관통하며 150분을 이끈다. 위대한 두 음악가를 다루지만, 이야기는 허구다. 베토벤이 ‘바이올린 소나타’까지 헌정했던 추앙받은 음악가는 무대에서 ‘모차르트 살해범’으로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영국의 유명 극작가 피터 섀퍼가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져 회자된 덕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살리에리는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한 범재로 남아있다. 평생 회자될 명곡을 꿈꿨으나, 사후에도 남겨진 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살리에리 증후군(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시기·질투하는 것)’이라는 불치병이 ‘평범한 사람들’ 곁을 수호자처럼 지킨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다루는 무대엔 강점과 약점이 뚜렷하다. ‘유명세’ 만큼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는 강점, ‘뻔한 서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약점이다. ‘아마데우스’는 강점이 더 빛난 작품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살리에리가 바라보는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시선이다. 모차르트의 명곡들이 나올 때마다 놀라운 음악에 대한 경외와 환희가 넘치고 두려움이 채워진다. 문학적인 대사로 빽빽히 채운 대본 안에 담긴 음악적 분석이 아름답다.
“음악은 단조롭게 시작했어요. 낮은 음의 악기들은 음악을 이었고, 클라리넷이 나올 때 이 음악은 나를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어요.” “음표를 하나만 빼도 전혀 다른 전개가 돼요. 번뜩이는 충동, 그 속의 조화로운 멜로디, 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어요.”
살리에리가 마주한 모차르트의 음악은 ‘경이’에 가까웠다. “재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격”이라며 세상은 모차르트를 찬양했고, 천재 앞에 한없이 비루해진 범재는 모차르트의 ‘영혼’ 말살 계획을 세운다. 가난 앞에 말라죽기를, 아버지라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 무너지기를 희망했다. 그 계획을 하나씩 실현하며 자신의 음악에 몰두하던 살리에리는 잠시나마 천진해보였다. 모차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행복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와의 만남은 절망이고, 좌절이었다. 신 앞에서 울부짖고, 그러다 신과 적이 된 인간. 살리에리의 삶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리에리의 생은 길을 잃었다.
작고 단조로운 무대를 빈틈없이 채우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이다. 연극이지만, 뮤지컬에 가깝도록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곡’들이 무대를 채운다. ‘레퀴엠’,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의 아리아를 듣는 재미가 크다.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모차르트 음악의 향연은 살리에리의 감정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살리에리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 작품의 색깔을 만든다. ‘젠더리스 캐릭터’의 상징과도 같은 ‘아마데우스’에서 차지연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온전한 살리에리’로 관객과 마주한다. 살리에리가 환생한 것처럼 음악 앞에 한없이 순수하고, 재능을 가진 자 앞에서 하염없이 초라해지는 인간의 모습으로다. 모차르트를 향한 질투와 집착을 그려내는 차지연의 살리에리는 무척이나 인간적이다. 천재를 향한 질투로 실패한 음악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그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의 대다수는 모차르트가 아닌 살리에리에 더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