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희의 리와인드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연, 지금 놓치면 안되는 공연들의 이야기를 ‘돌려감기’ 합니다. 생생한 라이브 무대에서 놓친 명장면과 공연의 뒷이야기도 함께 담았습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연, 지금 놓치면 안되는 공연들의 이야기를 ‘돌려감기’ 합니다. 생생한 라이브 무대에서 놓친 명장면과 공연의 뒷이야기도 함께 담았습니다.

“주인공은 카르멘 아닌 정명훈”…연출 없이도 증명한 ‘오페라 신(神)’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잘 조련된 명마처럼 금관 악기들이 리드미컬한 춤을 춘다. 단단하게 밀어붙이는 선율은 추동 엔진이 돼 흐른다. 다부지고 단호한 음표는 완벽하게 잘 짜인 ‘인생의 각본’.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이 이토록 짧은 3분에 담긴다. 아니나 다를까, 담배 연기처럼 피어난 현의 트레몰로, 심장박동처럼 바닥을 치는 팀파니. 그 사이를 가르며 한 인간의 운명이 도착한다. 세비야의 뜨거운 거리도, 투우장의 열기를 발산하는 경기장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세트도 없는 무대는 ‘조련사’ 정명훈의 양손이 공기를 가르자 19세기 스페인 세비야가 됐다. 남관모 KBS 교향악단 수석의 트럼펫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날아 꽂히고, 이원석 팀파니 수석의 강렬하고 경쾌한 타격이 이어지자 운명의 발소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쾌활한 행진곡이 이내 절정에 다다르니 난데없이 늦춰진 템포. 현악기의 불길한 반음계 진행으로 ‘운명의 테마’가 이어지면 바순의 중후하고 어두운 음색이 귓가에 내
2026.04.23 16:16
BTS 2.0, ‘아리랑’으로 쏘아 올린 ‘한국적 세계화’의 서막[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룻밤에 300리(140km)를 달렸다’는 파발꾼이 뛰어 들어온다. 붉게 타오르는 연막탄을 든 파발꾼의 다급한 발걸음은 곧 ‘희소식’이라는 것을 수만 관중은 당연히 직감한다. 이날만을 기다린 아미들의 함성이 쏟아진다. “난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야(I‘m ’bout to blow a fuse), 통제불능, 머리 춤, 뛰어 미친놈인 듯, 어디에나 내가 존재해(Me everywhere), 얼쑤” (방탄소년단 정규 5집 ‘아리랑’ 수록곡 ‘훌리건’ 중) 챙챙거리며 금속성 칼이 서로를 겨누는 소리가 창공에 흩어지자, 거친 랩이 쏟아진다. 오프닝 곡으로 이보다 완벽한 선택은 없었다. 파발꾼의 예고편으로 달아오른 무대는 ‘왕의 귀환’을 화려하게 선포했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경기 고양종합운동장에서 ‘BTS 2.0’을 선언하는 월드투어 ‘아리랑(ARIRANG)’의 막을 올렸다. 회당 4만 4000명, 세 번의 공연만으로 약 13만 2000명의 관객과
2026.04.12 14:47
‘왕의 길’ 위에 선 BTS…광화문 월대에 새긴 ‘아리랑’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안녕 서울, 위 아 백(We are back)!” ‘왕의 길’이 열렸다. 경복궁 근정전, 흥례문, 광화문을 지나 월대까지…. 세종대왕 동상을 마주하고 선 14.7m, 5층 높이의 큐브형 구조물 너머로 광화문의 위엄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랜 기다림이 함성이 돼 터져 나왔다. 수북한 운무 사이로 50명의 무용수가 길을 터주자, 방탄소년단(BTS) 일곱 멤버의 등장. 190개국에 생중계된 영상 안에선 미끄러지듯 훑어 내리는 카메라가 전 세계 아미들을 역사의 복판으로 끌어들였다. 방탄소년단이 돌아왔다. 21일 오후 8시 서울 광화문 광장은 전 세계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들의 심장 박동을 동기화한 K-컬처의 성지이자, 글로벌 대중문화의 교두보가 됐다. 하이브에 따르면 이날 현장에는약 10만 4000명의 관람객이 현장을 찾은 것으로 추산됐다. 티켓 예매자수, 통신3사, 알뜰폰 이용자, 외국인 관람객 수를 종합한 추정치다. 힙합 아이돌로 시작해 글로벌 팝스타를 거쳐,
2026.03.22 01:57
모든 길은 바흐로 통한다…안드라스 시프가 그린 건반의 계보학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꾸준히 한국을 찾는 거장은 이번에도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곤 무대 위 덩그러니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첫 곡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아리아 다 카포’. 내한 전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에도 바흐는 할 것”이라고 귀띔했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의 장장 3시간의 음악 여정의 출발이었다. 모든 길은 바흐로 통한다. 안드라스 시프가 펼쳐놓는 건반 위의 지도엔 언제나 ‘바흐’라는 거대한 태양이 존재했다. 88개의 건반을 잇는 시프의 음악 유전자는 언제나 바흐라는 ‘성산(聖山)’을 향해 있다.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관객과 만난 안드라스 시프의 리사이틀엔 어김없이 프로그램이 공개되지 않았다.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가 판매한 프로그램 북엔 그저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中’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연주자의 공연이 확정되고 통상 1년 전 프로그램을 공지하는 것과 달리 안드라스 시프의 공연은 관객
2026.03.17 14:20
찬란한 결핍, 우즈가 그려낸 청춘의 아카이브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더 깊이 빠져 죽어도 되니까, 다시 한번만 돌아와 줄래.” (우즈 ‘드라우닝(Drowing)’ 중) 청춘은 언제나 양면적이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지만, 그 이면엔 속절없이 가라앉는 심연이 공존한다. 우즈의 노래는 청춘을 앓는다. 그것도 지독하게, 그리고 뜨겁고도 시리게. 가수 우즈(WOODZ·조승연)가 14∼15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아카이브. 1’(Archive. 1)으로 월드쿠어의 포문을 열었다. 양일간 이어진 공연은 전석, 전회차가 일찌감치 매진됐다. 이번 공연은 우즈가 데뷔 13년 만에 내놓은 첫 정규 앨범 ‘아카이브’와 동명의 타이틀이 붙었다. 공연의 포문 역시 정규 앨범의 수록곡인 ‘블러드라인(Bloodline)’과 ‘다운타운(Downtown)’으로 열었으나,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그간 우즈가 쌓아온 치열한 ‘성장’의 궤적이었다. 그가 노래하는 청춘은 그저 맑고 밝고 희망차진 않다. 오히려 “나를 더 깊게 더 깊게, 잠겨
2026.03.15 23:58
군중의 광기부터 베드로의 통곡까지…3년의 기다림, 헛되지 않았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라! 딸들아! 나와 함께 슬퍼하자” “보라! 누구를? 신랑을! 그를 보라! 어떻게? 어린 양처럼!” (바흐 ‘마태수난곡’ 제1곡 합창) 합창단이 질문하고 답을 하듯 역할을 나눈다.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선 합창단은 서로 대화하듯, 와서 보라고 소리치고, 무엇을 보라는 것이냐며 묻는다. 그 순간 공연장은 극장이 됐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보다 비극적이며, 오페라나 뮤지컬보다 드라마틱한 격정과 속죄의 서사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2026년의 수난절에 찾아온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관객들을 300년 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로 데려갔다. 한국 고음악계에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김선아 지휘자가 이끄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Collegium Vocale Seoul)과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Collegium Musicum Seoul)이 3년 만에 다시 올린 무대다. 이날의 공연은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작품’을 감상하는 자리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
2026.03.12 15:42
아들뻘 연하남 쥐고 흔든 ‘버진 퀸’…배신·불륜 얼룩진 처절한 아리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절정을 지나버린 때였다. 50대에 접어든 중년의 여성. 그에겐 ‘정신적 교감’을 나눈 ‘영원한 연인’은 있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날 여자 앞에 길들지 않는 야생마 같은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나이는 21세. 자신보다 32살 어린 청년은 무모하고 오만했다. 눈부시도록 젊고 활기가 넘치는 청년. 모두가 눈치를 보며 자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때도, 오직 이 어린 청년만은 당당했다. 푸릇한 당돌함을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여자는 한참이나 어린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청년은 여자와 일생 ‘관념적 사랑’을 완성한 연인의 의붓아들이었다. 둘의 사랑은 14년이나 뜨겁게 타올랐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가 본편에선 생략한 전사(前史)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실존 인물인 엘리자베스 1세와 그의 총애를 받은 에식스 백작 로베르토 데브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실제
2026.03.09 14:38
‘폭행 사건’ 그 후, 달라진 거장의 큰 손이 가른 구원과 부활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과 목재 트라베르소의 숨결은 인간의 성대와 닮았다. 맑고 단단한 소리는 경건하게 이어졌다. 끊김이 없는 긴 호흡이 만들어낸 소박한 음성들, 그 안으로 역동적인 강약 조절이 담겼다. 극적인 긴장감은 음표와 음표 사이로 자연스레 묻어났다. 그러다 ‘글로리아’의 네 번째 곡 ‘주 하나님(Domine Deus)’에 접어들 때였다. 두 대의 플루트가 짧은 시차로 주고받는 카논에서 콘서트홀의 공기가 목재 악기의 따뜻함에 섞여 서로를 감싸 안았다. 나지막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사이에서 에덴동산을 노니는 작은 새처럼 지저귀는 오블리가토(Obbligato, 독창자가 노래할 때 중요한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 이후, 유달리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오블리가토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앉아야 할 두 플루티스트는 연주를 이어가느라 차마 무릎을 굽히지 못했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이들에게 재차 앉으라는 신호를 줬지만, 합창단이 일어선 순간에도 연주자들은 음악을
2026.03.05 16:11
열한 줄 설화가 빚은 핏빛 광기…‘몽유도원’이 보여준 ‘백제의 한(恨)’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처럼 절실하고 죽음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1500년 전 고매한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불과 열한 줄에 불과한 원전의 한문 기록은 그 어떤 정념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제48권 ‘열전’ 도미 편이다. 기록의 문장들이 나열한 도미와 그의 아내 아랑, 백성의 아내를 탐한 군주의 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가 ‘몽유도원’으로 옮기면서 ‘탐미주의’를 입었다. 소설은 다시 무대로 옮겨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쏟아낸 비극의 삼중주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 영웅’을 제작한 에이콤의 ‘몽유도원’(22일 국립극장 폐막, 4월 11일 샤롯데씨어터 개막)이 2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02년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몽유도원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뮤지컬이다. 윤호진 연출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감동시킬 수 있는 소재”라며 “소설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뿌리는 도미전에 있으나
2026.02.23 12:02
꿈꿀 수 없던 시대, 1930년대 경성이 보낸 답장 ‘팬레터’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리하여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1930년대 경성, 근대는 일제의 동의어였다.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문명이 일본군과 함께 밀고 들어왔다. 극단적 양면이 공존하던 공간, 근대는 기이하고 신비로웠지만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에서 내려다본 근대식 자동차는 ‘발광어류의군집이동’(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 중)으로 적혔고, 13명의 아해들은 그 모든 것이 무서워 내달렸다. 그 끝이 막다른 골목이었음에도. 조선인의 정체성이 말살되던 암흑기, 그 시대 문학계엔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문단을 지배해온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이하 카프)은 문학을 계급 투쟁과 정치 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 1931년, 1934년 일제의 검열로 카프는 무너졌고, 이 땅의 문학은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잃었다. 그 무렵 구인회(九人會)가 결성됐다.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여야
2026.02.18 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