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장총 의인화한 ‘빵야’
굴곡진 근현대사 관통하고
생생한 드라마 제작기 더하고
볼거리, 생각거리 많은 종합선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굳이 찾아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보관한 소품 창고. 낡은 영창 피아노 위, 멋스러운 세고비아 기타 옆으로 단단한 케이스에 담긴 장총 하나가 놓여있다. 이곳에 1945년생,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 ‘99식 소총’(99식 소총은 단총과 장총으로 나뉜다)이 살고 있다. 이름은 ‘빵야’. 78년의 기구한 삶에 비한다면 지나치게 귀여운 이름이다. 연극은 빵야와 드라마 작가 나나의 만남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빵야의 대사)
총은 말을 한다. 한국 연극 사상 본적 없던 기이한 장면이다. 굴곡진 생을 보내온 장총을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앞세운 사람은 2016년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김은성 작가다. 2020년 극본을 완성하고, 3년이 지나 마침내 막을 올린 작품이 바로 연극 ‘빵야’(2월 26일까지, LG아트센터)다.
연극은 김 작가가 집중력을 가지고 담아온 한국 근현대사의 연장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녹인 ‘뻘’(2013), 한국전쟁 직전 이념 대립을 그린 ‘로풍찬 유랑극단’(2012),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목란 언니’(2012)를 통해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난 삶에 주목했던 김 작가의 역사 인식과 시선을 볼 수 있다. 2016년 ‘썬샤인의 전사들’이 소년의 전장 수첩을 매개로 한국 현대사를 풀어냈다면, ‘빵야’는 ‘99식 소총’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사의 장면 장면을 그려낸다. 한국문화예술회의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뮤지컬 ‘아몬드’의 김태형이 연출을 맡았고, 배우 하성광 문태유가 ‘빵야’를 이진희 정운선이 나나를 연기한다.
‘매문의 시대’ 고민…분주히 오가는 빵야와 나나의 연대기
연극 ‘빵야’의 이야기는 두 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주인공도 두 명이다. 이 둘은 묘하게 닮았다. 한쪽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굴곡진 삶을 살다 쓸모(?)를 다 한 장총, 한쪽은 한 물간 드라마 작가. 조금씩 밀려나 중심에선 멀어졌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 된다. 이들의 가슴엔 못 다 이룬 꿈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무대는 ‘빵야의 삶’과 ‘나나의 삶’을 분주하게 오간다. 빵야를 주인공으로 대본을 쓰기 시작한 드라마 작가인 나나의 작업기와 빵야가 지난한 생의 이야기다. 두 삶을 풀어내야 하기에 연극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장총의 연대기’ 못지 않게 드라마 작가의 삶도 파란만장하기 때문이다.
장장 세 시간의 러닝타임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무대는 숨 돌 일 틈 없이 장면을 바꾸고, 역사의 한복판과 나나의 현실을 쉴새없이 오간다. 힌트나 복선, 암전도 없이 장면 전환이 이뤄지고, 1인 다역을 소화하는 7명의 배우(오대석 이상은 김세환 김지혜 진초록 송영미 최정우)들은 뻔뻔하게도 ‘빵야의 시대’와 ‘나나의 현실’ 속 인물을 소화한다.
빵야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몰입은 높아진다. 그의 생은 빵야를 거쳐간 주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군 장교 기무라, 일등병 길남, 중국 팔로군 강선녀, 한국군 학도병, 북한군 의용대, 빨치산 소녀, 심마니, 사냥꾼…. 이들과 함께 빵야는 독립군을 토벌하고, 제주 4.3 사건을 마주하고, 6.25 전쟁에서 동지였다 적이 되고, 빨치산에 총구를 겨눈다. 사냥을 하고, 로비용 선물이 됐다가, 공연 소품으로 끊임없이 총성을 울린다.
빵야와 함께 한 주인들의 이야기는 적절한 신파와 자극을 오간다. 무겁고 비극적인 근현대사이면서도, 옴니버스 형식으로 쉽게 구성했다. 17명이나 되는 주인들의 에피소드는 하나 하나 강렬하다. 기구하지 않은 삶이 없다. (기무라는 빼야 한다.) 빵야의 주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가며, “악랄한 폭력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다. 클리셰가 많은 에피소드이나, 그 위로 다른 색을 입히는 것은 꼼꼼하게 메워진 배경 설명이다.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던 역사 한 줄이 이들의 삶에 비극적 무게를 더한다. 주인들의 삶은 감정의 여운이 짙고,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흡인력이 있다. 짧게 떨어지는 대사로 인해 속도감이 빠른 것도 매력이다.
이러한 시도가 나나의 ‘드라마 대본’이라는 점을 감안한 설계였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대본은 없다. 빵야의 드라마를 쓰는 나나는 ‘역사를 쓰는 작가’로서 연극 내내 고민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편성을 받기 위해 ‘잘 팔리는 글’을 써야 하는 작가로의 실존적 고민이다. 나나는 “역사를 쓰는 이유는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록하는 일”이라고 주술 같은 주문을 외며 마음을 붙잡으면서도,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닌지” ‘매문(賣文)의 시대’를 고민한다. 흥미롭게도 나나의 고민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작품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짚어보게 한다.
거대한 한국사’ 위에 꺼내놓는 수많은 질문들
‘빵야’는 질문하고 고민하는 연극이다.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질문과 메시지를 던진다. 빵야와 주인들이 보내온 질곡의 삶을 통해 근현대사를 인식하는 시선을 묻고, 나나의 고민을 통해 역사를 소비하는 방식과 ‘자본의 시대’에서도 지켜야 하는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비극적 역사와 특정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다루지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빵야를 바라보는 시선도 여럿일 수 있다. 빵야의 모든 순간은 비극이었다. 빵야의 세계관은 2023년의 대한민국과 닮았다. 젊은 세대를 지배하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정서가 빵야에게도 존재한다.
끊임없이 ‘빵, 빵, 빵’,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를 외쳐야 하는 빵야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처절하다. “이토록 끔찍한 소리를 내는 총”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무겁고 슬프다. 치욕의 역사를 보낸 일제 강점기를 거쳐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낸 전쟁의 한복판을 지나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고, 지키고, 또 죽이고 살렸다. 사람을 죽이다 동물을 죽이고, 좀 쉴 만할 때 영화 속에서 쏘고 또 쏘는 삶이었다.
그러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빵야에게 ‘러브 마이셀프’(Love myself)는 사치다. ‘이생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딱히 없다. 그래서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이 정답이라 여겨지는 시대다. 그럼에도 빵야에겐 꿈이 있다. 꿈은 희망인데, 빵야가 꿈을 말하는 순간 그의 삶은 더 슬프게 다가온다. 다시 총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빵야의 삶은 ‘역사를 관통한 장총’이 아닌 ‘월급의 노예’, 혹은 ‘계층의 사다리’에 가로막힌 삶으로 치환해도 공감대가 형성된다. 연출을 맡은 김태형은 “빵야의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상사의 명령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우리의 삶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워낙에 볼거리도 많아,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은 무대를 활용하고, 캐릭터를 구현하는 방식도 능수능란하다. 1인 다역을 하는 7명의 배우들은 장면마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꾼다. 빵야의 주인이 됐다가, 나나의 드라마 대본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말 많은 제작사 사람들이기도 하다. ‘시청률 1위’의 인기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스타 캐스팅을 강조하고, 시청자를 사로잡을 ‘러브 스토리’를 넣어야 한다며 벌이는 난상토론이 가관이다. 실제로 드라마 제작 현장과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한국사’ 사이사이를 습격하듯 밀고 들어오는 만담 같은 현실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뿐만 아니라, 빵야의 시간마다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낸 노래와 안무는 무대 교체 없이도 역사 속으로 관객을 이끄는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