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클라이번 우승 기념 독주회
BTS 못지 않은 질감 다른 함성
2500명 열광한 ‘신드롬의 증명’
공연 시작 전 음반 1000장 품절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함성의 ‘질감’이 완전히 달랐다. 격렬한 소용돌이로 휩쓸린 리스트 ‘순례의 해’ 중 이탈리아 제7곡 소나타풍 환상곡인 ‘단테를 읽고’(단테 소나타)를 마치자, 객석은 일제히 기립해 떠날 듯한 함성을 쏟아냈다. 2500석의 예술의전당 클래식홀 역사상 이런 함성은 없었다. 세계적인 K팝스타 방탄소년단(BTS)의 콘서트에서나 들을 수 있는 기현상이 올해 최고의 ‘클래식 스타’의 공연장에서 들려왔다. 또 하나의 역사였다. 열여덟 소년은 스스로 전설을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의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기념 리사이틀이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지난 6개월 사이 임윤찬을 둘러싼 환경은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지난 6월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로 우승한 이후 임윤찬은 단숨에 2022년 ‘최고의 클래식 스타’로 떠올랐다. 까다로운 데다 말을 아끼기로 유명한 클래식 음악계 사람들조차 ‘소년’ 임윤찬의 연주를 듣고는 ‘천재’라는 수사를 붙였다. 이젠 내한하는 음악가들 모두 임윤찬의 이름을 언급할 만큼, 그는 세계 음악계에서 중요한 피아니스트가 됐다.
더 큰 변화는 음악이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김선욱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 정명훈의 원코리아오케스트라, 홍석원의 광주시립교향악단을 비롯해 다수의 연주회를 통해 임윤찬은 짧은 기간 큰 성장과 도약의 발판을 다졌다. 이날의 리사이틀은 임윤찬을 향한 뜨거운 열광의 증명이었다.
오후 5시, 연미복을 입은 임윤찬이 걸어나오자 객석은 다양한 화음의 함성을 쏟아냈다. 피아노 앞으로 걸어간 임윤찬은 숨 고를 여유도 두지 않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콩쿠르 우승 기념 독주회이지만, 임윤찬의 선곡은 우승곡에 머물지 않았다. 콩쿠르에선 단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음악들로 꽉 채워, 관객들을 임윤찬이라는 ‘새로운 우주’로 초대했다.
독주회의 1부 선곡은 임윤찬이 스승인 손민수 교수와 함께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꼽는 글렌 굴드라는 공통의 주제가 만들어졌다. 첫 곡은 17세기 영국 작곡가 올랜도 기번스의 ‘솔즈베리 경의 파반과 갈리아드’. 기번스는 글렌 굴드가 가장 사랑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차분하게 시작한 절제한 연주는 이날 공연의 ‘전초전’이었다. 조금은 리드미컬하고 빨라지는 템포에서도 임윤찬은 무리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깔끔한 연주를 들려줬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 중 ‘15개의 3성 신포니아’에서도 굴드의 흔적은 발견됐다. 임윤찬은 1957년 굴드가 모스크바에서 연주한 순서대로 신포니아 15곡을 연주했다. C장조로 시작하는 경쾌하고 낭랑한 1번에선 선명한 음색의 오른손이 반짝거렸다. 이어 두 사람의 속삭이는 대화 같은 C단조의 2번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5번으로 이어진 흐름이 기가 막혔다. 고음의 오른손이 말을 건네면, 저음의 왼손은 고개를 끄덕였고, 의도를 가지고 음량을 조절하며 두 사람의 대화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갔다. 14번에 이르면 임윤찬은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며 박자를 맞췄다. 그러다 11번에 이르면 다시 톤 다운이 시작됐다. 4번에선 남겨진 두 사람의 대화를 관망하는 듯 슬픔의 감정이 깊이 채워졌다. 무거운 침묵의 공간에선 호흡조차 연주가 됐다. 신포니아를 통해 임윤찬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얼마나 다양한 색과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들려줬다. 임윤찬이 연주한 15곡엔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생애를 향한 경의가 담겨 있었다.
2부는 리스트의 세계였다. 첫 곡으로는 ‘두 개의 전설’ S.175 중 1곡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물 위를 걷는 파올라의 성 프란체스코’를 들려줬다. ‘두 개의 전설’은 리스트가 종교에 귀의해 지은 곡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일대기가 담겼다.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를 건반으로 옮겨온 것처럼 소년은 또 하나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1부와는 완전히 다른 음색으로 터치가 시작됐다. 전설 속 주인공이거나 신화 속 존재가 된 것처럼 아름다운 음색이 이어졌다. 오른손이 건반을 밀어내듯 터치를 이어갈 땐, 물 위를 뛰어노는 요정들이 가볍게 내려앉은 소리가 들렸다. 이어 묵직한 저음과 함께 고전적인 피아노로 분위기를 바꾸며 ‘물 위를 걷는 성 프란체스코’를 들려줬다. 소리의 크기와 터치의 강약 조절에 자신의 의도와 상상력을 담아낸 연주였다.
대미를 장식한 ‘순례의 해’ 중 이탈리아 제7곡 소나타풍 환상곡인 ‘단테를 읽고’(단테 소나타)는 이날 독주회의 명장면이었다.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타건은 화려한 리스트가 임윤찬에게 찾아온 것처럼 들렸다. 몰아치는 속주에서도 단 하나의 음도 놓치지 않는 천재적인 기교, 그러면서도 문학적 서사가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들까지 악구마다 깊숙하게 각인했다. 서정적인 연주를 들려주다가도 천둥 같은 폭풍우가 밀려드는 극적인 연주와 구성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변화무쌍한 피아노의 세계에 분위기가 고조되면 임윤찬은 그 스스로 무수히 많은 음표가 돼 악보 위로 내려앉았다.
숨 막히고 신들린 연주 이후엔 바흐의 ‘시칠리아노’와 ‘고도프스키가 편곡한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가 앙코르로 이어졌다. 너무도 뜨거워 모조리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 위로 부유한 아름답고 슬픈 선율은 짙은 여운을 남겼다.
이날의 독주회는 모든 면에서 기이했다. 임윤찬 독주회의 현장은 이미 공연 두세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인 2부로 판매를 제한한 프로그램북과 음반은 공연 시작 한 시간 전 동이 났다. 음악계 관계자에 따르면 클래식 공연장에서 음반 1000장을 모두 판매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다고 한다. 연주회가 끝이 나자 클래식홀은 팬미팅 현장이 됐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임윤찬의 모든 순간을 담아냈다. K팝 가수 공연장에서 있을 법한 기현상이 예술의전당 클래식홀에서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객석의 함성 역시 연령대를 초월한 젊고 싱그러운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공연장에서 만난 김수빈(34) 씨는 “밴 클라이번 파이널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듣고 팬이 됐다”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준 피아니스트이다. 오늘 공연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던 시간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