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희의 리와인드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연, 지금 놓치면 안되는 공연들의 이야기를 ‘돌려감기’ 합니다. 생생한 라이브 무대에서 놓친 명장면과 공연의 뒷이야기도 함께 담았습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그냥 떠나보내기 아쉬운 공연, 지금 놓치면 안되는 공연들의 이야기를 ‘돌려감기’ 합니다. 생생한 라이브 무대에서 놓친 명장면과 공연의 뒷이야기도 함께 담았습니다.

아들뻘 연하남 쥐고 흔든 ‘버진 퀸’…배신·불륜 얼룩진 처절한 아리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절정을 지나버린 때였다. 50대에 접어든 중년의 여성. 그에겐 ‘정신적 교감’을 나눈 ‘영원한 연인’은 있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날 여자 앞에 길들지 않는 야생마 같은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나이는 21세. 자신보다 32살 어린 청년은 무모하고 오만했다. 눈부시도록 젊고 활기가 넘치는 청년. 모두가 눈치를 보며 자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때도, 오직 이 어린 청년만은 당당했다. 푸릇한 당돌함을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여자는 한참이나 어린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청년은 여자와 일생 ‘관념적 사랑’을 완성한 연인의 의붓아들이었다. 둘의 사랑은 14년이나 뜨겁게 타올랐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가 본편에선 생략한 전사(前史)다. 이 오페라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실존 인물인 엘리자베스 1세와 그의 총애를 받은 에식스 백작 로베르토 데브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실제
2026.03.09 14:38
‘폭행 사건’ 그 후, 달라진 거장의 큰 손이 가른 구원과 부활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과 목재 트라베르소의 숨결은 인간의 성대와 닮았다. 맑고 단단한 소리는 경건하게 이어졌다. 끊김이 없는 긴 호흡이 만들어낸 소박한 음성들, 그 안으로 역동적인 강약 조절이 담겼다. 극적인 긴장감은 음표와 음표 사이로 자연스레 묻어났다. 그러다 ‘글로리아’의 네 번째 곡 ‘주 하나님(Domine Deus)’에 접어들 때였다. 두 대의 플루트가 짧은 시차로 주고받는 카논에서 콘서트홀의 공기가 목재 악기의 따뜻함에 섞여 서로를 감싸 안았다. 나지막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사이에서 에덴동산을 노니는 작은 새처럼 지저귀는 오블리가토(Obbligato, 독창자가 노래할 때 중요한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 이후, 유달리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오블리가토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앉아야 할 두 플루티스트는 연주를 이어가느라 차마 무릎을 굽히지 못했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이들에게 재차 앉으라는 신호를 줬지만, 합창단이 일어선 순간에도 연주자들은 음악을
2026.03.05 16:11
열한 줄 설화가 빚은 핏빛 광기…‘몽유도원’이 보여준 ‘백제의 한(恨)’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처럼 절실하고 죽음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1500년 전 고매한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불과 열한 줄에 불과한 원전의 한문 기록은 그 어떤 정념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제48권 ‘열전’ 도미 편이다. 기록의 문장들이 나열한 도미와 그의 아내 아랑, 백성의 아내를 탐한 군주의 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가 ‘몽유도원’으로 옮기면서 ‘탐미주의’를 입었다. 소설은 다시 무대로 옮겨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쏟아낸 비극의 삼중주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 영웅’을 제작한 에이콤의 ‘몽유도원’(22일 국립극장 폐막, 4월 11일 샤롯데씨어터 개막)이 2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02년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몽유도원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뮤지컬이다. 윤호진 연출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감동시킬 수 있는 소재”라며 “소설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뿌리는 도미전에 있으나
2026.02.23 12:02
꿈꿀 수 없던 시대, 1930년대 경성이 보낸 답장 ‘팬레터’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리하여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1930년대 경성, 근대는 일제의 동의어였다.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문명이 일본군과 함께 밀고 들어왔다. 극단적 양면이 공존하던 공간, 근대는 기이하고 신비로웠지만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에서 내려다본 근대식 자동차는 ‘발광어류의군집이동’(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 중)으로 적혔고, 13명의 아해들은 그 모든 것이 무서워 내달렸다. 그 끝이 막다른 골목이었음에도. 조선인의 정체성이 말살되던 암흑기, 그 시대 문학계엔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문단을 지배해온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이하 카프)은 문학을 계급 투쟁과 정치 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 1931년, 1934년 일제의 검열로 카프는 무너졌고, 이 땅의 문학은 정치적, 사회적 목소리를 잃었다. 그 무렵 구인회(九人會)가 결성됐다.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여야
2026.02.18 15:14
이건 꼭 봐야 해! 티켓팅만 성공한다면…헤비급 도파민 ‘킹키부츠’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킹키부츠’ 롤라 넘버 중)이고, 무엇을 기대하든지 그 기대를 뛰어넘는다. 막이 오르면 혼이 쏙 빠져 한눈팔 새가 없고, 입꼬리와 광대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뒤흔들어버릴 새빨간 활력소다. 아직도 안 봤다면, 지금 당장 공연장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올 한 해, 당신에게 가장 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공연의 여운으로 최소 3주간 행복할 수도 있다. 물론 티켓을 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제 쇼츠(Shorts)는 그만, 장장 155분 넘게 도파민이 풀충전되는 강력한 보상이 이 무대에서 시작된다. 바로 ‘킹키부츠’다. “나는 나쁜 기지배, 육감적인 지지배, 그댈 위한 깜짝선물, 아니 신이 내린 요물” 심장을 부여잡자. 무대 위 ‘붉은 반짝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어렴풋이 ‘롤~라~’를 찾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면, 그때부터 무대는 ‘대반전’의 시작이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
2026.02.17 18:04
“우리 집은 왜 트리마제가 아닐까”…아이들의 눈으로 본 ‘오감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붉은 커튼 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실 세상은 무서운 것투성이다. 90년 전 경성의 도로를 질주하며 ‘무섭다’고 외치던 13인의 아해는 2026년 서울에서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무서운 것들’이 많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어른이 돼도 왜 그리 ‘무서운 것들’이 많은지, 9명의 아이가 뱉어낸 무서움은 그들의 전유물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근원적 공포로 전이된다. 1934년, 한국 문단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스캔들’과 같았던 시인 이상의 ‘오감도’가 90년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로 환생했다. 극단 공놀이클럽을 이끄는 강훈구 연출가를 통해서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선 ‘근대’라는 전례 없는 변화와 공포를 마주한 아이들이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모습을 그린다. 띄어쓰기를 침묵한 파격적 형식의 시(詩)가 품은 신경증적 불안은 오늘과 만나 눈앞에 잡히는 두려움으로 무
2026.02.09 19:43
다빈치 스승 된 장영실…‘국뽕’ 치사량 넘은 ‘한복 입은 남자’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너였다. 내가 그토록 닿으려던 별.”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중) 시공을 초월해 두 사람이 만났다. 조선의 시간을 설계하고, 백성의 삶을 구원한 ‘실용주의 과학자’ 장영실(1385~1442년 이후, 미상)과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인류의 미래’를 캔버스에 그린 세기의 천재 다빈치에게 장영실은 그리운 조선을 품은 채 이렇게 말한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의 한 장면이다. 이 낭만적 상상력은 ‘한 장의 그림’에서 출발한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터 파울 루벤스(1577~1640)가 1617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드로잉 ‘한복 입은 남자’다. 그림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83년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다. 미국의 석유 재벌 J.폴 게티는 당시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당시 한화로 약 6억6000만원)에 그림을 낙찰받았다. 현재에도 그가 설립한 게티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그림 속
2026.02.09 15:26
건반 위로 내려앉은 그리움의 암호… 정명훈과 임윤찬이 연 ‘신세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클라라의 이름이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암호가 된 ‘CHAA’는 임윤찬의 미동도 않는 호흡에 실려 C-B-A-G#(도-시-라-솔#)으로 시린 겨울 저녁의 문을 열었다. 선율의 간격마다 숨을 멎고 기다리는 것처럼 미세하게 늦춰진 그 흐름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모든 음표와 악보에는 저마다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임윤찬은 슈만이 숨긴 그리움의 암호를 해독하며 피아노를 어루만지듯 사랑의 대화를 나눴다. 어린 피아니스트가 속삭일 때마다 거장 마에스트로는 눈을 감고, 충분히 음악을 읊조렸다. 1845년 12월 4일 독일 드레스덴의 호텔 드 작스에서 페르디난트 힐러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클라라 슈만이 협연했던 슈만 피아노 협주곡(A단조, Op. 54)이 181년의 세월을 지나 한국에서 울려 퍼졌다. 그때처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KD)가, 악단 역사상 최초의 수석객원지휘자인 정명훈, 그리고 지금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완전히 사로잡은 피아니스트 임
2026.02.03 17:13
시(詩)를 입은 무대의 ‘도파민 디톡스’…극장이 경험을 파는 법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 시에 전에 없던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종족의 등장.” 젊은 시인 신이인을 수식하는 문장을 눈에 담자, 그가 공연 도중 무대로 걸어 나왔다. 객석은 등진 채 80명의 남자, 여자, 중년, 청년, 혹은 아이 앞에서 시를 읽는다. ‘꿈의 고백’이었다. “친언니가 피자를 사와서 내게 한 조각 먹이고 말했다 /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외계인이었는지도 몰라. (중략) 지구는 재미있구나 가족이 이종족일 수 있다니 / 외로워도 홀로 이종족인 편이 낫겠지.” ‘외계인’, ‘이종족’과 같은 낯선 시어 덕에 시인의 중저음 목소리와는 무관하게 시는 재기발랄하고 귀여워진다. 귀여움이 외로움을 집어삼키진 않았으나, ‘별종’의 ‘별종들’을 향한 시선엔 따뜻한 이해가 담긴다. 이 시가 불시착한 곳은 오는 6월 개막을 앞둔 뮤지컬 ‘더 트라이브’(6월 9~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런던의 한 박물관을 배경으로 성소수자인 남자와 슬럼프에 빠진 작가
2026.01.26 15:26
한 서린 광활한 저음…“약 때려 넣고” 노래한 임재범의 마지막 콘서트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첫 공연에서 술에 취한 미군 세 명 앞에서 노래를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전부 여러분 덕분입니다.” 이태원 ‘락월드’에서 3명뿐이던 관객을 앞에 두고 노래하던 청년은 40년 노래 인생의 문을 닫고 영혼의 쉼터를 찾기로 했다. 지난 17~18일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체조경기장)을 휘감은 ‘작별의 공기’는 겨울바람처럼 시렸지만, 뜨거운 애틋함이 피어났다. 임재범의 ‘마지막 콘서트’가 된 데뷔 40주년 전국투어 ‘나는 임재범이다’의 서울 공연이다. 오래도록 견딘 시간이었다. ‘상실의 비명’을 부정하다, ‘후회로 자책한 눈물’을 흘렸고, ‘온 세상 소리를 보두 잠그고 적막에’(이상 ‘내가 견뎌온 날들’ 가사 중) 자신을 가뒀던 날들. 그 시간을 꺼내는 임재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객석으로 날아든 담담한 작별 편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9000여명의 관객 앞에서 그는 무겁게 입을 뗐다. 임재범은 “알고
2026.01.19 0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