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무장애 음악극 ‘합★체’
배리어프리 공연의 진화와 확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퉁퉁퉁퉁, 나의 모든 힘을 담아 공을 튕겨, 퉁퉁퉁퉁, 나의 모든 맘을 담아 공을 튕겨.”
긴박한 노래의 시작. 노래엔 수많은 감정과 동작이 담겼다. ‘키 크는 것’이 지상 최대 목표인 쌍둥이 형제의 간절함,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결의. 힘찬 목소리로 내는 ‘공 튀기는 소리’는 곧 다가올 농구시합의 전초전이다. 배우들은 드리블 시늉을 내는 안무와 비장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귀를 닫아도 들을 수 있는 생생한 장면 장면이 무대 위로 그려진다. 박지리 작가의 동명소설을 무대로 올린 국립극장의 무장애(배리어 프리, Barrier-free) 음악극 ‘합★체’다.
국립극장이 제작한 첫 무장애 공연 ‘합★체’는 여러모로 이색적이다. ‘배리어프리’가 아닌 공연과는 당연히 달랐고, 공연계에서 시도해온 배리어프리 공연과도 달랐다. 지금까진 없던 시도가 빼곡히 채워진 공연이다.
무대는 본격적인 시작 전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하니, 무대 양옆의 자막 스크린이 켜졌다. 청각 장애인 관객들을 위한 ‘자막표기에 대한 설명’이 등장, 화면을 채웠다. ‘ [] 음악 및 음향 효과, ♪ 노래 및 음악, ♬계속되는 음악, ( ) 인물 및 배역, 노란색 인물이 노래로 부르는 대사(가사)’ 등을 먼저 설명했다.
간략한 설명이 끝나면, 무대는 이제 공연을 준비한다. 무대 위에 자리한 7인조 밴드가 악기를 조율하자, 화면엔 [악기 조율하는 소리]라는 자막이 뜨고,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리자 [공연 시작을 알리는 종]이라는 친절한 자막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기존의 공연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작이었다. 객석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귀를 기울이는 시작 장애인 관객, 수어로 대화하는 청각 장애인 관객, 그리고 비장애인 관객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무장애 공연’이 아니라면 배우들이 등장해 스토리의 출발을 알렸겠지만, ‘합★체’는 무대 구조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음성 해설을 맡은 라디오DJ 지니 역의 정다희 “무대 왼쪽에는 합체의 집이 있고, 그 옆으로 8개의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아버지의 공간을 의미하는 놀이동산이 있다”며 무대 위 구석구석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한다. 이어 작품의 주조연 배우들과 수어 통역 배우까지 소개를 마치면,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합★체’는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와 비장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 오합, 오체의 성장담이다. 작품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난쟁이’라는 단어처럼 합과 체는 아버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사춘기의 모든 소년들이 그렇듯 ‘성장의 멈춤’에 대한 ‘불안’을 안고 매일을 보낸다. 고등학생에게 ‘작은 키’는 ‘놀림거리’다. 학교에선 같은 반 아이들이건 선생이건 “둘이 합체 좀 하면 진짜 합체한 것처럼 키가 쑥쑥 클지도 모른다”며 ‘작은 키’로 조롱거리로 만든다.
얼굴은 같은 쌍둥이이지만, 성적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은 놀림을 대하는 태도마저 다르다. 공부를 잘하는 합은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피 끓는 다혈질 체는 모든 것을 ‘도발’이자,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장애등급 6급으로 분류되고, 성인 기준 허리춤 아래의 세상에 살고 있던 아버지, 그래서 ‘난쟁이 쇼쟁이’로 불리고, 트럭의 시야에는 잡히지 않아 끔찍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는 체에게 작은 키는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쌍둥이 아버지 역엔 저신장 장애를 가진 배우 김범진이 출연, 당사자성을 반영한다. 눈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작은 키가 표면적 장애였다면, 학교 안에서 합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작품이 상징하는 정서적 장애처럼 비친다. 무대는 쌍둥이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름방학 수련’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합체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합체’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간다.
스토리 못지 않게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합★체’는 지금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화한 형태의 배리어프리 공연이다. 기존의 배리어프리 공연은 타이틀과는 별개로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무대 한 켠에 배치한 수어 통역과 자막 해설은 ‘사회의 요구’로 인한 구색 맞추기 식의 ‘배리어프리’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잖았다.
‘합★체’는 애초 기획 단계부터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갔다. 무대엔 연기를 맡은 배우는 물론 이들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수어 통역 배우가 함께 등장한다. 무대 끝으로 비켜나 소외된 수어가 아닌 한 무대에서 배우의 연기와 안무를 함께 하며 새로운 공연 형태를 보여줬다. 실제 농인이 수어 번역을 맡고, 수어를 안무에 활용해 ‘눈으로 보는 노래와 춤’을 완성했다. 수어 통역이 청각 장애인을 위한 효과라면, 시각 장애를 가진 관객을 위해 라디오DJ 지니가 음성 해설을 더했다. ‘귀로 듣고 보는’ 공연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지니는 극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주인공들의 감정까지 연기한다. 배우들은 원작 속 인물들이 살아난 것처럼 실감나게 연기해 작품의 호감도를 높였다.
무대 위엔 다양한 언어가 공존한다. 배우와 수어 통역 배우가 등장하고, 이들을 통해 음성언어와 수어가 동시에 무대를 꾸민다. 작품의 다양한 언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구현된다. ‘합★체’는 ‘음악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클래식, 재즈, 왈츠, 힙합, 팝 등 무수히 많은 장르의 음악을 들려준다. 이토록 많은 장르의 음악이 한 작품 안에 나오는 경우도 흔치 않다. 음악 안엔 소리의 움직임을 담은 의성어, 의태어까지 담겨 시각장애인들이 소리를 통해 무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지원 연출이 말한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시각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의 완성이었다.
어쩌면 ‘불가능한 실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두 달 반의 시간 동안 배우는 물론 제작진은 낯선 날들을 경험했다.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배우와 그림자 통역이 ‘합체’의 과정을 이루기 위해 “발을 밟히고 동선이 꼬이는”(김지원 연출) 숱한 시간을 겪어냈다. 이 공연에 대한 우려나 지레짐작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배우와 수어통역 배우가 함께 움직이기에 무대가 복잡하고, 시선이 분산돼보일 거라는 우려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시도였기에 나온 기우였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배리어프리 공연으로의 이러한 실험과 도전은 원작이 가진 명료한 이야기와 쉬운 구성의 강점을 잘 살렸기에 가능했다. 공연을 관람한 비장애인 관객 최연주 씨는 “배우와 수어 통역 배우가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모습이 새로워 도리어 흥미로웠다”며 “내용을 이해하거나 연극을 보는 데에 방해가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도리어 방해가 된 것은 무대 위로 흩뿌려진 안개가 수어 통역을 가리는 장면이었다.
‘합★체’는 배리어프리 공연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작품이다. 공연계에선 “모두를 만족시키는 배리어프리 공연은 없다”고 말한다. 장애는 저마다 다르고, 이들마다 생각도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합★체’의 시도는 작품 속 여름 수련동안 성장한 주인공들처럼 한 뼘의 확장과 진화를 보여줬다. 엉뚱한 상상과 황당무계한 사건, 그 안에 자리한 장애를 향한 여러 시선, 이를 뛰어넘어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나만의 탄력도를 찾아가는 성장담이 시각, 청각, 동작을 아우르는 여러 감각의 공존으로 또 하나의 공연 장르를 태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