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뮤지컬 거장’ 손드하임
잔혹한 ‘피의 복수’ 그린 블랙코미디
6년 만에 돌아온 전미도의 미친 연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러빗부인(전미도)의 신이 난 검은 눈동자엔 장난기가 가득 들어찼다. ‘내용물도 부실하고 감동이 없는 소설가 파이’, ‘주둥이만 살아서 씹는 맛이 최고인 변호사 파이’, ‘꽉 막혔지만 실속 넘치는 안전빵 공무원 파이’, ‘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 정치인 파이’를 만들 생각에. 뮤지컬 ‘스위니토드’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토드와 러빗 부인의 ‘어 리틀 프리스트(A Little Priest)’다. 살벌하고 기괴한데, 웃음이 터지고야 만다. 씹고 뜯는 ‘풍자의 맛’이 기가 막혀서다. 무대 위 살인마들의 이야기처럼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어차피 “서로 잡아먹는 인간들”이니, 도축하듯 사람을 죽여 ‘인육파이’ 만들어 먹는 것쯤이야.
뮤지컬 ‘스위니토드’(3월 5일까지, 샤롯데씨어터)가 돌아왔다. 브로드웨이가 자랑하는 ‘뮤지컬 전설’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걸작. 한국에선 2016년 초연 이후, 2019년에 두 번째 무대를 가졌고 올해가 세 번째 시즌이다. 특히 이번엔 ‘슬기로운 의사 생활’로 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전미도가 6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무대다.
‘스위니토드’는 국내 대극장에선 보기 드문 스타일의 뮤지컬이다. 한 인간, 주로 남성, 거기에 익히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든 상상의 인물이든 이들의 고난과 역경의 삶을 무대로 끌어온 기존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재, 스토리, 음악까지 대범하고 독특하다. 화려하고 화사한 ‘어른들의 동화’였던 기존 뮤지컬과 달리 어둡고 퀘퀘하며 잔혹하다.
무대는 19세기 영국으로 이동한다. 산업혁명으로 빈부격차가 극에 달하고, 사회 불평등과 부조리가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시대. 누명을 쓰고 런던에서 추방당한 이발사 벤저민 바커가 15년 뒤 스위니토드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돌아와 벌이는 복수극이다.
밤이슬이 내려앉은 눅눅하고 습한 런던의 뒷골목. 폐공장을 모티브로 제작된 이곳에서 막이 오른다.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19세기 런던 사람들이 이 도시를 떠도는 괴담 하나를 들려준다.
“들어는 봤나, 스위니토드. 창백한 얼굴의 한 남자. 시퍼런 칼날을 쳐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네. 이발사 탈을 쓴 악마.” 바로 그 남자가 런던으로 돌아오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스위니토드가 복수의 칼날을 세운 상대는 귀족 판사 터빈. 그에게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내쫓긴 이 남자(신성록)는 런던에서 가장 맛이 없는 ‘파이 가게’를 운영하는 러빗부인과 복수를 시작한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은 블랙코미디의 매력을 살렸다. “인류의 역사엔 언제나 윗놈이 아랫놈 등쳐먹기” 일쑤인데, 인육파이 덕에 ‘기막힌 반전’이 시작된다. “윗놈이 아랫놈 식사거리”라고 노래하는 스위니토드와 러빗부인의 눈빛에 생기가 넘친다. 사람을 죽여 파이를 만드니 “장례식도 할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라나. 인육을 재료로 쓴 이후 러빗부인의 파이 가게는 승승장구다. 21세기의 관객을 18세기로 데려가나 ‘어 리틀 프리스트’에 실린 가사엔 부정부패와 권력 제일주의가 도사린다. 복수극이라는 큰 틀로 사회 비판적 주제의식을 형상화한 것은 무대다. 4층 높이의 벽과 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다리로 구성된 철골 구조로 얽히고 설킨 캐릭터들의 관계를 보여줬다. 지정된 출입문을 통해 등장과 퇴장을 유도하는 것은 계급으로 분리된 사회와 인물 간의 관계를 표현했다는 것이 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설명이다.
작품의 백미는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다. 낯선 불협화음의 연속은 기괴한 스토리와 죄책감 없는 캐릭터에 안성맞춤이다. 이 불협화음의 매력을 살리는 러빗부인 전미도는 지금 뮤지컬 계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같은 배우다. 이미 2016년 이 역할을 맡으며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는 독특한 발성으로 뒤집어지는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대사와 노래까지 소화한다.
러빗부인은 이상한 캐릭터다. 사적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스위니토드 곁에서 복수할 대상도 없으면서 범죄 행위에 가담한다. 뜬금없는 외사랑과 연민으로 그를 감싸안으면서도 살인을 부추기고, 그것으로 파이까지 만드는 ‘혁신적 발상’의 러빗 부인은 단 한 줄로 정의하기 어려운 기괴한 탐욕덩어리다. 그런데 전미도의 ‘러빗부인’은 기묘하다. 잔혹하고 섬뜩한데 귀엽기까지 하다. 사이코패스의 기행과 ‘인육 파이’라는 기괴한 창의력을 비집고 나오는 불편한 죄의식마저 잊게 해주는 연기다. 다만 함께 연기하는 스위니토드 신성록은 딱 떨어지는 분장만큼 어우러지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주진 못했다. ‘피의 복수’는 결국 비극으로 향한다. 이 지점은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세계에 사는 두 사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잊지 않게 해준다.
작품을 봐야할 이유는 많다. ‘스위니토드’는 기본적으로 웰메이드 뮤지컬이다. 잔혹한 세상을 향한 통렬한 풍자, 공포를 극대화하는 불협화음은 등장인물 각자의 이기와 복수심, 탐욕을 잘 살렸다. 전미도 역시 ‘스위니토드’를 선택해야할 이유다. 아직도 배우 전미도를 말간 얼굴의 채송화(슬기로운 의사생활)로 기억한다면, 지금 당장 이 무대를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