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정명훈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조성진 협연 마지막 공연·뜨거운 기립박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미 열 번도 넘게 호흡을 맞춰본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무대. 오랜 인연, 그만큼의 시간의 길이가 빚어내는 조화로움은 유독 빛났다. 협연자 조성진과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세심히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 솔로의 연주 중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휘자 정명훈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만남’이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선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1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정명훈,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마지막 협연 무대가 관객과 만났다. 30여분의 화려한 협주곡은 한 눈 팔 새도 없이 흘러갔고, 협연을 마치자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립해 한국 클래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클래식 음악 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도 유명하다. 장엄한 호른으로 시작하는 협주곡은 피아노의 완벽한 박자와 타이밍이 빚어내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로 출발한다.
조성진의 시작은 청아했다. 청명한 겨울 아침처럼 깨끗한 피아노 소리가 우아한 현 사이를 오차 없이 파고들며 협주곡은 인상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 곡과 조성진의 인연은 깊다. 열여섯 살에 처음 연주를 했고, 201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 당시 역대 최연소 참가자로 결선에 올라 이 곡을 연주했다. 조성진은 오케스트라의 실수에도 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다. 정명훈과는 이듬해 6월 그가 지휘하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 곡을 연주했다. 콩쿠르에서의 악몽을 떨쳐낸 아름다운 연주가 만 열여덟 살의 조성진에게서 나왔다. 그의 옆엔 정명훈이 있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수없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함께 했다. 조성진의 연주는 군더더기 없고 섬세하다. 협주곡은 악단과 피아노가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대결을 하는 듯 했고, 그러다가도 하나가 됐다. 1악장은 복잡다단해 너무도 많은 얼굴을 보여줬다. 격정적이면서도 묵직한 타건, 새가 지저귀는 듯한 여린 타건을 오가며 극적인 묘미가 살아났다. 웅장한 독일 관현악단의 함성에 조응하듯 조성진은 악단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건반에 내려앉았다. 누구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1악장의 마무리가 완벽한 합을 이룰 땐 짜릿한 감동이 찾아왔다. 격정적인 1악장을 마친 뒤 정명훈과 조성진은 서로를 격려하듯 눈을 맞추고 숨을 골랐다.
현의 피치카토로 2악장이 시작되면 음악은 얼굴을 바꾼다. 플루트의 선율과 아름답고 서정적인 피아노의 시작. 조성진의 섬세한 감성을 잘 만날 수 있는 2악장에선 그가 “벨벳 같다”고 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현악기 소리와 각각의 악기의 생생한 음색을 만날 수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음표가 쏟아지는 3악장에 이르면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주고 받는 대화마다 슬라브의 애수가 담겼다. 러시아의 뒷골목을 쉴새 없이 헤매다가도 오케스트라의 결기로 갈 길을 되찾고, 피아노와 각 악기들이 주제 선율을 반복하며 같은 정서를 만들어갔다.
지휘자 정명훈의 손은 마법이었다. 그의 절제된 동작에 악기들의 음색은 하나 하나 살아났다. 마에스트로는 각각의 악기가 품은 음색을 끌어내며 이들이 돋보이고 빛나야 할 자리를 탁탁 집어 들려줬다. 그러다가도 이내 악기들은 다시 균형을 맞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피아노와 하나가 됐다. 피아노 소리는 때때로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됐고, 각 파트의 악기들은 피아노가 된 것처럼 서로의 역할을 주고 받았다. 굳이 여러 말을 나누지 않아도 속내를 헤아리는 오래된 친구 같았다.
한국을 찾은 드렌스덴과 정명훈, 조성진의 마지막 무대는 모두에게 최상의 만족감을 안겼다. 3악장까지 마치자 조성진과 정명훈은 서로를 안으며 만면에 웃음을 보였고, 관객들은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다.
조성진의 앙코르는 최근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발매한 신보 ‘헨델 프로젝트’ 수록곡으로 빌헬름 켐프 편곡 버전으로 녹음, 유튜브를 통해 연주 영상으로도 공개된 ‘미뉴에트 G단조’였다. 격정이 지나간 뒤 찾아온 따뜻한 감성이 객석을 감쌌다.
공연의 2부에선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과 베버의 ‘마탄의 사수’ 서곡이 이어졌다.
곡의 배치가 흥미롭다. 보통 연주회의 첫 곡 순서로 배치되는 서곡이 제일 마지막에 연주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악장 밖에 되지 않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이어받기에 ‘마탄의 사수’가 지닌 강건함은 안성맞춤의 마무리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미 10여년간 호흡을 맞춘 정명훈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호흡은 이 두 곡에서 더욱 빛났다. 묵직하고 중후한 사운드와 빈틈없이 짜여진 악기들의 조화로움은 독일 정통 관현악의 정수를 보여줬다. 정명훈은 굳이 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오케스트라는 그의 의도를 간파한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모든 곡을 암보로 지휘한 그는 필요한 때에만 큰 움직임을 썼고, 적재적소에서 악기별 음색의 특징을 끌어내며 구조적 음악 안에서 섬세한 질감을 살렸다.
음악은 정명훈의 모든 몸짓에 따라 소리가 달리 들렸다. 제 1 바이올린 파트로 몸을 돌려 두 손을 감싸 몸쪽으로 끌어당기면 현악 파트가 풍성하게 빨려들어 악단 전체를 끌어안는 소리를 냈다. 그의 손에 따라 악단의 음색과 음향이 시시각각 달라지면서도 악단만의 균형미를 들려줬다. 피날레로 향하는 ‘마탄의 사수’에선 정명훈의 절도있고 파워풀한 움직임으로 강인하고 굳건한 질주가 마무리됐다.
공연에 앞서 진행한 간담회에서 정명훈은 “시간이 지나야만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2001년 처음 인연을 맺었고, 2012년부터 수석 객원 지휘자로 함께 했다. 정명훈은 이 악단과의 호흡에 대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됐고, 잘못된 일이 있거나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시간의 힘을 이겨내는 것은 없었다. 이들의 긴 인연의 힘이 이날 공연의 결과였다. 앙코르는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이 곡의 연주를 시작하기 전 그는 “음악의 끝은 늘 사랑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봄의 향기를 먼저 싣고 온 브람스의 사랑이 객석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