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돈키호테’ 초연

송정빈 안무가의 영리한 재탄생

춤추는 돈키호테ㆍ짧은 호흡 강점

결혼식 그랑 파드되, 여전히 압권 

‘돈키호테’의 영리한 재탄생…키트리 32회전 압권 [고승희의 리와인드] 
국립발레단 ‘돈키호테’[국립발레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추장스러운 갑옷과 부츠를 벗고, 백발의 수염은 떼버렸다. 기골이 장대한 ‘젊은’ 돈키호테가 마침내 날아올랐다. 나이가 들어 춤을 출 수 없었던 돈키호테는 그의 꿈 안에서 그토록 그리던 ‘환상 속 여인’ 둘시네아와 파드되를 춘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자 안무가인 송정빈이 재해석한 발레 ‘돈키호테’에서다.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4월 16일까지, 예술의전당)는 마침내 ‘돈키호테’다워졌다. 이 작품은 스페인 극작가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1869년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를 맡아 초연한 고전이다. 제목이 ‘돈키호테’였음에도 주인공은 돈키호테가 아니다. 돈키호테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된 춤 한 번 추지 못했고, 주인공마저 다른 사람에게 내준 조연에 불과했다. ‘꿈만 꾸던 영혼’이 ‘꿈 속에서’(2막 1장 드림신) 다시 태어났다.

송정빈 안무가가 되살린 돈키호테는 여러모로 영리했다. 원작에선 시도하지 않았던 상상이 요정들과 함께 살아났다. “작품 제목이 ‘돈키호테’인데, 돈키호테는 마임만 하는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과 “꿈 속에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안무가의 아이디어가 유연하게 버무려진 무대였다. 젊은 돈키호테는 요정들의 무대에 어우러지며 둘시네아와 마주 한다.

‘돈키호테’의 영리한 재탄생…키트리 32회전 압권 [고승희의 리와인드] 
국립발레단 ‘돈키호테’ 드림신 [국립발레단 제공]

스페인의 낭만과 정열이 휩쓸고 간 1막이 끝이 나면 2막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신비로운 숲속 풍경. 엄연히 ‘요정들의 공간’이자 ‘꿈’이라는 환상성이 100% 반영된 서정적 무대가 시작된다. 푸른 조명 아래 정교한 자수가 놓아진 옥빛 튀튀(TUTU, 발레리나의 옷)를 입은 요정들과 장난스런 큐피드의 무대다. 돈키호테가 춤을 추는 ‘드림신’은 기존 요정들의 아름다운 서정성을 살리되, 돈키호테와의 유연한 어우러짐을 만들어냈다. 둘시네아와 돈키호테를 둘러싸고 대열을 맞춰선 요정들은 이 장면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치였다. 젊은 돈키호테는 솔로를 통해 신이 난 듯 회전과 점프를 이어갔다. 속이 후련해지는 장면이었다. 다만 둘시네아와 돈키호테의 파드되 등 없었던 장면의 존재감이 빛을 발해서 인지, 기존 큐피드의 사랑스러운 무대는 다소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돈키호테’의 영리한 재탄생…키트리 32회전 압권 [고승희의 리와인드] 
국립발레단 ‘돈키호테’ 캐스터네츠 솔로 [국립발레단 제공]

‘돈키호테’는 볼거리가 많은 공연이다. 전반적으로 호흡이 빨라 지루할 큼도 없었다. 3막은 2막으로 축약했고, 그 과정에서 1막 바르셀로나 광장에서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솔로 장면들을 쳐내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스페인 무희들을 연상케 하는 나풀거리는 캉캉 스커트는 빠르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움직였다. 때때로 무용수들이 빠른 음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볼거리는 많았다. 고전 발레 형식을 따르면서도 스페인의 색채는 잊지 않았다. 하늘 높이 치솟는 팔 동작은 플라멩코를, 발로 차는 동작은 투우사를 연상케했다. 작품 곳곳에 어우러진 스페인 춤들이 무용수들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부각시켰고, 강렬하고 이국적인 낭만을 살렸다.

‘돈키호테’의 영리한 재탄생…키트리 32회전 압권 [고승희의 리와인드] 
국립발레단 ‘돈키호테’ 결혼식 그랑 파드되 [국립발레단 제공]

이 작품의 명장면은 키트리의 캐스터네츠 솔로와 결혼식에서의 그랑 파드되다.

캐스터네츠 솔로는 뜨거운 태양 아래 스페인으로 향한 것만 같은 장면이다. 현란한 캐스터네츠에 맞춰 드레스를 쉴새없이 찰랑이며 고난도 춤이 이어지는 모습에선 박수가 쏟아질 만했다. 키트리의 아름다운 춤을 지켜보던 무대 위 여성 구경꾼들이 캉캉 스커트를 들어올리며 흔드는 장면은 불필요해 보였다.

‘돈키호테’의 백미는 결혼식에서의 그랑 파드되(고전 발레에서의 남녀 2인무)가 꼽힌다. 튀튀로 갈아입은 키트리와 바질은 드라마틱한 전개의 음악과 함께 피날레를 향해 나아갔다. 고난도 테크닉이 이어지며 ‘기량 대잔치’를 벌이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두 사람은 흠 잡을 데 없는 무대를 이어갔다. 키트리의 무대는 신들린듯 현란했다. 32회전 푸에테(fouette, 한 발로 다른 다리를 차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빠르게 도는 동작)는 압권이었다. 흔들림 없이 완벽한 푸에테를 마치자 객석에선 함성이 쏟아졌다. 마지막 그랑 파드되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