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계의 아이돌’ 메켈레

오슬로 필하모닉과 첫 내한 

큰 키와 긴 팔의 시원한 지휘

190㎝ 지휘 영웅의 탄생…“현악 잘 살린 매끈한 해석” [고승희의 리와인드]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오슬로 필하모닉. [빈체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0㎝의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나와, 포디움에 섰다. 긴 두 팔을 힘차게 벌려 허공을 가리키는 그는 마치 승리를 확신한 장수 같기도 하고, 어둠을 헤치고 나온 영웅 같기도 했다. 지금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첫 내한 공연.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 훤칠한 미모, 피아니스트 유자왕의 연인…. 세간에 오르내리기 좋은 모든 ‘조건’을 갖춘 메켈레는 마지막 남은 ‘물음표’마저 ‘느낌표’로 바꿨다.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가 그의 악단인 오슬로 필하모닉을 이끌고 지난 30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한국 관객과 만났다. 팬데믹으로 두 번이나 내한 일정은 취소됐고, 마침내 세 번 만에 성사된 한국 공연에서 그는 시벨리우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메켈레의 자신감이자, 안성맞춤인 선택이었다. 핀란드에서 태어나 음악을 공부한 그가 핀란드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는 것만큼 ‘최적의 조합’은 없었다.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재닌 얀센, 오슬로 필하모닉. [빈체로 제공]

포디움 바의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 메켈레와 악단은 잠시 숨을 죽였다. 시작과 동시에 찾아온 적막. 그것이 교향시 ‘투오넬라의 백조’의 시작이었다. 현악기들이 바람을 일으키듯 활을 긋자, 어김없이 시벨리우스 특유의 색채가 묻어났다. 북유럽의 서늘한 바람이 낮게 일며 초목을 흔들기 시작했고, 메켈레는 쥐락펴락하듯 음을 주무르며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관객을 이내 신화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곡은 핀란드 신화 ‘칼레발라’에서 태어났다.

재닌 얀센(45)과 협연한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선 또 다른 음악색과 그림을 보여줬다. 얀센은 가히 ‘여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만큼 풍성하고 입체적인 소리로 첫 음부터 악단을 장악했다. 그의 활 시위에 보폭을 맞추듯 메켈레는 악단의 힘을 풀더니, 아주 적절한 시점에 팀파니를 울리며 자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압도적인 여왕의 선율에 따라 오케스트라는 의도적으로 음량의 폭을 조절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이 도리어 거대한 진폭을 만들어내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메켈레는 불필요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필요에 따라 긴 팔을 쭉쭉 뻗으며 행진곡 풍의 대서사시를 써내려갔다. 협주곡에서 1악장을 마친 뒤 간간이 박수가 터졌지만, 메켈레와 얀센은 깊어가는 가을처럼 무르익은 2악장으로 객석의 수선함도 잠재웠다. 격정적인 연주가 힘에 부칠 법도 하지만, 얀센은 3악장까지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단호한 확신들은 북유럽의 설산처럼 견고하고 투명했다.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재닌 얀센, 오슬로 필하모닉. [빈체로 제공]

이날의 ‘메인 요리’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이었다. 시원시원하게 팔을 쭉쭉 펼치며 유려한 현악 파트의 울림으로 2부는 시작됐다. 메켈레의 시벨리우스는 다채로웠다. 북유럽의 음울과 자연의 서정을 넘어 아기자기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악기 하나하나가 재잘거리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생기를 불어넣었고, 그러다가도 무언가 사건을 도모하는 듯한 첼로 소리가 깔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2악장에 이르면 메켈레는 바이올린의 리듬에 맞춰 몸을 갸우뚱 거리며 리듬을 맞췄고, 시벨리우스의 색이 옅어질 때쯤 목관악기들이 등장해 시벨리우스의 정체성을 살려줬다. 3악장에선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금관소리, 더블 베이스의 콜레뇨(활의 나무 부분으로 현을 두드리는 주법)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와 흥미로웠다. 메켈레의 시벨리우스는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는 북유럽의 시린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리면서도, 우울감은 덜어냈다. 연주가 씩씩하게 환희를 향해 걸어가자, 음악은 새로운 ‘지휘 영웅’의 탄생을 알렸다.

190㎝ 지휘 영웅의 탄생…“현악 잘 살린 매끈한 해석” [고승희의 리와인드]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오슬로 필하모닉. [빈체로 제공]

메켈레는 음악을 마치고 나면, 매번 함박웃음을 지으며 관객과 함께 박수를 주고 받았다. 이날의 앙코르는 ‘슬픈 왈츠’. 기괴하고 격렬한 줄 알았던 왈츠는 때때로 즐겁기도 했다. 메켈레 역시 지휘를 가장한 왈츠를 추며 마지막 무대를 즐겼다. 이전엔 본 적 없던 생동감 넘치는 시벨리우스였다.

이날 공연을 찾은 이원석 KBS교향악단 팀파니 수석은 “오슬로 필하모닉은 단단하게 전체적인 사운드가 잡혀 있고, 밸런스가 좋은 악단이다”라며 “이번 공연은 스트링을 유연하게 잘 살리는 매끈한 해석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메켈레는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인 피에타리 잉키넨과 같은 요르마 파눌라의 제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