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시대’ 스타일리시하게 매만진 ‘연출의 힘’…연극 ‘화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역성 혁명으로 새 왕조가 들어서던 어수선한 시기. 1398년 초 늦겨울, 강원도 정선의 서운산 골짜기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른 사람들이 산다. 권력에 휘둘릴 일도 없고, 세류에도 무심한 사람들. 그곳으로 권력의 최정점에 섰던 사람들이 숨어든다. 연극은 한 줄의 역사에서 시작됐다. ‘두문동에 숨어 지내던 고려 유신 72명 중 전오륜을 비롯한 7명이 강원도 정선 서운산으로 은거지를 옮겨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야기. 이를 모티브로 삼은 ‘화전’(2월 17~25일, 대학로예술극장)은 창작공동체 아르케가 장장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준비한 작품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다. 이야기의 줄기는 단순한 데다 상투적이다. 조선의 건국에 고개 숙이지 않고, 강원도 정선으로 숨어 들어간 고려의 충신들과 서운산 골짜기에서 흙을 밟으며 살아온 화전민들이 뒤엉켜
2024.03.01 08:06같은 곡을 친 ‘쇼팽 콩쿠르 선후배’ 블레하츠vs조성진…승자는?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쇼팽이 걸어나왔다. 메마른 겨울 나무의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롭게 보이다가 그 위로 날아든 작은 새처럼 발랄이 비집고 나온다. ‘쇼팽의 나라’에서 태어나, 쇼팽을 가장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가르는 콩쿠르에서 역사적 기록을 세운 주인공. 라파우 블레하츠(39)는 피아노 앞에 앉은 내내 쇼팽의 현신이었다. 라파우 블레하츠가 한국을 찾았다. 123년 역사를 가진 모국의 악단인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다. 바르샤바필은 1901년 창단 직후 유럽의 주요 악단 중 하나로 도약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후, 1950년 부활해 폴란드의 음악적 뿌리를 잇고 있는 오케스트라다. 바르샤바필과 라파우 블레하츠는 지난 13일 부천아트센터에서 한국 관객과 만나 슈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줬다. 이 곡은 지난해 11월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끄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조성진이 함께 한 연주이기도 하다. 블레하츠와 조성진은 10년의 시간
2024.02.14 14:58일상의 영웅들이 건넨 ‘위대한 기적’과 ‘연대의 힘’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것은 실화다. 2001년 9월 11일. 납치된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이 세계무역센터로 날아든 직후였다. 그 시각, 캐나다 뉴펀들랜드 소도시의 갠더 국제공항은 초비상 사태가 됐다. 미국 영공이 폐쇄,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들이 이곳에 불시착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 6대의 비행기가 착륙하고, 고작 1만 명 밖에 살지 않는 갠더에 38대의 비행기에서 7000명의 사람들과 19마리의 동물들이 도착한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해 개막해 막바지를 향해가는 ‘컴 프롬 어웨이’(2월 18일까지·광림아트센터 BBCH홀)는 9.11 테러 당시 갠더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이다. 원작의 대본과 작곡을 맡은 캐나다 출신의 아이린 산코프와 데이비드 헤인은 9.11 테러 10주년인 2011년 갠더를 찾아 현지인들과 비행기 승객들을 인터뷰하며 작품을 썼다. 부부 창작자인 두
2024.02.12 20:21시대 초월한 명작 ‘레미제라블’에도 구멍은 있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레미제라블’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도둑이나 범죄자를 ‘미제라블’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미저리(궁핍)’가 ‘미제라블’한 짓을 범하게 한다는 메시지예요.” (뮤지컬 ‘레미제라블’ 작가 알랭 부블리)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의 징역을 살고 나온 장발장, 미혼모라는 사실이 발각돼 공장에서 쫓겨났고, 딸의 약값을 벌기 위해 거리의 여자가 된 판틴, 부조리한 시대에 정의를 외치는 청년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쓴 소설 ‘레미제라블’은 ‘궁핍한 사람들’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무대로 가져온 뮤지
2024.02.11 19:02갑질 사이코패스 vs 양딸 탐하는 父…누가 더 미쳤을까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빨간 달이 검은 우물 속에 지글지글지글….” 지독하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요동친다. 뒤엉킨 욕망과 사랑 속에 결국 금기에 다다르고, 금기 따위 아랑곳 않은 욕정은 끝내 파국을 향한다. 지금까지 이런 창극은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격정적 서사에 도파민이 솟구친다. 단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무대로 옮긴 남성 창극 ‘살로메’(2월 2~4일, 대학로예술극장)는 희대의 막장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갑질 공주vs그녀를 사랑한 양부…막장의 ‘레벨업’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눈꺼풀을 덜덜 떨며 ‘두더쥐 같은 눈’(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중)으로 자신을 훑어대는 양아버지 헤로데 왕의 시선에 치를 떠는 살로메. ‘은
2024.02.05 15:54고도를 기다리다 미쳐간 노장들의 티키타카…150분이 ‘순삭’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골길, 나무 한그루, 저녁때’.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1막의 배경은 이렇게 적혀있다. 무대는 그것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메마른 나무 하나, 의자를 대신하는 커다란 바위 하나. 황량한 길 위에서 에스트라공(신구)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옥죄는 신발을 벗으려 애를 쓴다. 주름 많은 무딘 손은 퉁퉁 부은 발에서 신발을 벗겨내려 하지만 ‘이게 뭐라고’, 쉽지 만은 않다. 그 옆으로 등장한 친구 블라디미르(박근형). 어딘지 텐션 높고 싱거운 그가 등장하면 두 사람 사이의 찰진 ‘티키타카’가 이어진다.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부랑인이 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불과 이틀간의 이야기.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희곡은 20~21세기 동안 전 세계 50개국 언어로 번역돼 무수히 많은 무대를 만들었다. 한국에선 극단 산울림의 대표인
2024.02.04 16:05‘성소수자’ 수영 vs ‘자폐인’ 세정…연극에서 꺼내놓은 민낯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문이 열렸고, 전, 걸어나왔습니다.” 연극 ‘템플’의 한 장면. 김세정은 이 한 문장을 말하는 동안 호흡을 두 번 멈췄다. 찰나의 공백에 감정의 변화가 담겼다. 떨리는 음성엔 나를 깨부수고 나올 문이 열리기까지의 두려움, 마침내 문이 열리는 순간을 마주한 기쁨, 그 문턱을 넘어섰을 때의 뿌듯함과 벅참이 묻어났다. 그 모든 감정과 감정 사이의 호흡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객석 끝까지 맞닿자, 저마다의 문을 찾는 관객들의 훌쩍임이 커졌다. 때로는 아주 짧은 대사에서 배우의 민낯을 보게 된다. 한 줄의 대사엔 그것을 말하기까지 쌓아온 감정의 서사가 응축된다. 격렬한 언쟁이나 감정의 진폭을 드러내는 장면보다 더 배우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다. 무대로 걸어나온 두 배우에게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다. 배우 최수영과 김세정이다. 연극과는 ‘초면’인 두 사람은 크고 화려한 가수 시절의
2024.02.01 23:35이쯤하면 ‘국민 남매’…‘BTS 팬’도 온 악뮤의 유토피아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인천)=고승희 기자] “아, 사실 팬은 아닌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왔어요. 오늘부터 악뮤 팬 하려고요!” 서울 양천구에 살고 있는 스무 살 김이진 양. 누가 봐도 팬이었다. 심지어 떼창 구간에 등장하는 추임새까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게’에서 코러스가 대신해야 하는 “완전 꼬맹이”를 목이 터져라 외쳤고, ‘200%’에서 수현이 “난 스트로베리처럼”이라고 노래를 부르면, ‘베리 베리’라고 화답했다. 그런데도 팬은 아니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한다”며 아미(방탄소년단 팬덤)라는 고백. 하지만 “늘 나의 성장 과정에 악뮤가 있었고, 워낙 노래를 좋아해 공연에 꼭 오고 싶었다”며 “라이브로 들으니 더 좋았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쯤하면 &
2024.01.28 21:51임윤찬과 만난 츠베덴…‘황제의 탄생, 거인의 첫 걸음’ [고승희의 리와인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소년의 성장은 찬란했다. 패기와 열정이 넘쳤던 어린 황제는 전장의 고통까지 끌어안은 성년이 돼있었다. 황제는 마침내 태어났다. “음악만을 위해 살겠다”던 영재 피아니스트의 다짐이 음악으로 증명되는 순간을 관객은 마주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세계적인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이 만났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의 취임 연주회를 함께 하는 자리. 지난 25일(예술의전당), 26일(롯데콘서트홀) 열린 두 번의 공연은 스타 음악가들이 함께 한 자리였던 만큼 공연 전부터 화제였다. 티켓 예매 시작 1분 만에 양일간의 좌석은 동이 났고, 시민 무료 추첨 티켓 경쟁률은 340대 1에 달했다. 임윤찬의 공연 날마다 이어지는 주차 대란은 여전했고, 공연장 로비는 시작 1시간 30분 전부터 K-팝 스타 못잖은 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공연 시작 10분 전까지도 일찌감치 매진된 프로그램 북을 애타게 찾아 다녔다. 임윤찬이 한국 관객과의 만남에서
2024.01.28 15:50노래神 vs 연기달인 vs 테너상...3인 3색 ‘조선인 최초 테너’ [고승희의 리와인드]
뮤지컬은 단 한 줄의 역사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한국 오페라’인 ‘춘희(라 트라비아타)’를 무대에 올린 주인공. 일제강점기 동양 제일의 테너로 불린 성악가 이인선(1907~1960)에 대한 기록이다. 성악가 이인선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일 테노레’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쓴 박천휴 작가는 “실존 인물 이인선에게서 따온 건 딱 한 가지”라며 “1940년대 초반 의대생이었지만,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유명한 성악가에게 오페라를 배웠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일 테노레’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나른했던 국내 뮤지컬 업계에 모처럼 등장한 신선한 소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흥행이 검증된 대작, 혹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반 고흐와 같은 서양 위인이 주인공이었던 그간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모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2024.01.24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