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큐브프로젝트 ‘리콜; 불러오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오면, 대형 모니터로 ‘Recall’(리콜)이라는 단어가 뜬다. 숨 막히듯 째깍거리는 소리가 극장을 메우고, 하얀 무대 위로 남자는 뛰어오른다. 깜빡이는 조명에 맞춰 시계 소리 같기도 하고, 메트로놈 소리 같기도 한 기계음이 커지며 숨통을 조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무렵, 무대는 얼굴을 바꾼다. ‘밀당’이 제법이다.
등장부터 신선했다. 무대 아래에서 무용수들이 올라온다. 일곱 명 ‘완전체’가 되자, 피아노와 관악기가 버무려진 재즈풍 음악에 맞춰 나긋나긋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뮤지컬의 1막 ‘첫 번째 신’ 같은 인상적인 출발. 알록달록한 평상복을 입은 무용수들은 의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다 무대 오른쪽에 움푹 파인 구멍 안으로 뛰어든다. 다시 홀로 남겨진 남자는 무대 끝에 설치된 작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안무와 연출을 맡은 정성태다.
“어느날 어떤 여성분이 지나가는데 향수 냄새가 확 풍겨왔어요. 그때 누군가 떠올랐어요. 제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첫사랑이었죠. 그 향수 냄새로 그 사람이 갑자기 떠올랐어요.”
■ ‘기억은 미래를 향해 있다’…‘리콜;불러오기’의 탄생 서사
‘리콜;불러오기’(1월27~28일, 대학로아트센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시간은 기억이다”라고 했다.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직선의 세계’에 남겨진 기억들은 ‘어떤 감각들’에 의해 소환된다. 이를테면, 우연히 맡게 된 향수 냄새 같은 것. 이 작품의 출발점이다. ‘리콜;불러오기’의 안무와 연출을 맡은 정성태는 “이미 지나간 시간 뒤로 어떤 자극에 의해 불려온 기억을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며 “정확하지도 않은 기억, 그 기억으로 따라온 감정을 통제하면서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이 끝난 이후 가지게 되는 감상과 비평은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작품의 지향점은 있다. 조금 더 ‘즐겁고 행복한 미래’, 조금 더 ‘긍정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부정적이고 불편한 감정과 기억이 어느 순간 우리를 습격해도, 과거의 “불분명한 기억과 감정 상태에 휩쓸리지 말자”고 말한다. “기억은 미래를 향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성태 안무가가 이끌고 있는 화이트큐브 프로젝트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공연을 보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이 단체의 슬로건이다.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은 다양한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현대무용에 스트릿 댄스는 물론 서커스와 아크로바틱의 요소까지 더한다.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한국무용을 섭렵한 정성태는 2015년부턴 서커스를 시작했다. “리스크가 있는 모든 것은 서커스”라는 판단은 그에게 컨템포러리 서커스의 무한한 확장성을 안겨줬다. 서커스가 현대무용과도 관통하는 부분이 있겠다는 생각에 그의 작품 안엔 점차 고난도 움직임이 담기기 시작했다. ‘리콜;불러오기’도 그 중 하나다.
■ 기억 소환 위해 불려오는 ‘감정의 조각들
‘기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기 위해, 무대는 먼저 감정을 이야기한다. 1막의 시작이다. 기억이 불러내는 것은 결국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쁨, 슬픔,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움직임으로 확장했고, 인터뷰 형식을 빌어 언어화했다. 일견 친절한듯 보이면서도 무용수들은 사람과 추상적 존재(감정)를 오가기에 작품은 무용 특유의 불친절함도 안고 있다.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한가운데에 남겨진 남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빠져든 ‘존재’들을 힘겹게 끌어올린다. 그러다 힘겨루기에 밀려 그조차 구멍으로 버려진다. 끝을 알 수 없는 골짜기 같은 구멍에 버려진 것은 ‘잊혀진 기억’, ‘사라진 감정’들이다. 시간이 흘러가 흐릿해졌고, 시간이 지나 그리 명확하지 않는 기억과 감정들. 생명력을 잃고, 널브러진 ‘감정의 조각들’을 소환하며 무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끝끝내 구덩이에서 끌려 올라온 감정들은 욕심이 많다. 어떤 것은 기쁨, 어떤 것은 분노, 어떤 것은 슬픔. 기선 제압을 위해 이들은 서로를 밀쳐내고, 내던지고, 잡아당긴다. “감정을 모티프로 한 움직임”은 사람의 몸을 오로지 중력에 맡긴다. 향수 냄새로 소환된 남자의 기억은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상처와 분노로 뭉쳐져, ‘감정의 쓰레기’로 소멸한다. 그 뒤로 감정과 기억의 소환이 반복된다. ‘감탄과 칭찬을 잘하는’ 누군가의 기억은 공중곡예 같기도 하고, 카포에라 같기도 한 묘기 대행진의 몸짓으로 이어진다. 상처받은 감정은 전염성이 강해 서로를 물들인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무대는 ‘감정의 전이’로 정지되고 만다.
작품은 볼거리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장면 장면마다 무용수들이 만들어가는 춤의 장르가 다양하다. 고난도의 스턴트 치어와 아크로바틱, 왁킹, 현대무용, 귀여운 몸짓에 이르기까지 매신다마 새로운 춤으로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인다. 상징적 의미의 집합체인 무용 장르에 언어를 더한 것도 독특한 구성이다. 무용 무대를 보러오는 관객은 스토리텔링도 만나게 된다. 그럴 지라도 인터뷰와 춤 사이의 개연성을 찾으려 하면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다. 독특한 구성과 다양한 몸짓에 만족하는 편이 좋다.
■ 오브제에서 찾은 영감…머릿속 구현한 기발한 무대
하이라이트는 2막(‘머릿속에서’)이다. 다소 추상적이며 정리되지 않은 1막이 끝나면 무대로 다양한 구조물이 올라온다. 스스로를 ‘오브제 충’이라고 말하는 정성태 안무가는 평소 “구조적 오브제를 통해 종종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오브제가 주제로 나아갈 때도 있고, 주제를 정한 뒤 오브제를 찾을 때도 있다. ‘리콜;불러오기’는 오브제가 먼저인 작업이었다.
거대한 트램펄린과 3m 높이로 된 정육면체의 철골 구조물, 대형 경사로. 이 무대는 ‘인간의 머릿속’을 상징한다. 1막을 통해 두서없이 튀어나온 기억과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을 구현한 것이다. 상상력이 기발하다. 어린 시절 TV 만화에서 보던 장면처럼, 무대가 꾸며낸 우리의 머릿속은 꽤 사랑스럽다. 기억이 소환되는 과정을 구조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철골 구조물 위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위태롭고 위험하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철골 구조물이다. 무용수들은 깡충 뛰어 철봉을 내려오고 두 팔로 매달리다 가로로 몸을 누인다. ‘열일’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시냅스는 곧 튀어오를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이다. 외부의 자극이 전해지면 전자기기의 출력 단자처럼 기억의 파편은 문을 열고 나가 경사로 위에서 갈 길을 찾아 헤매인다. 그러다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다가 다시 경사로를 오른다. 사라지려다 뚜렷해지는 기억들, 외부의 자극에 의해 트램펄린으로 튕겨져 나간다.
뒤엉킨 기억들의 소환은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경사 무대에서 어떤 것은 꽤나 힘들게 기억을 더듬고, 가까스로 떠올린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떠다니는 ‘기억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머릿속 기억들은 철골 구조물부터 경사로, 트램펄린으로 순환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이 기억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기도 하다. 마지막 관문인 트램펄린에서 뛰어오른 기억들이 바로 1막에서 만난 감정으로 표현된 세계다. 트램펄린은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을 내던지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하지만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버려져도, 습격하듯 튀어오른다.
‘리콜;불러오기’를 만나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다. 상상해본 적 없는 세계를 구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무대 구조, 연출 등이 일관된 방향을 향해있다. ‘기억이 소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관을 설계한 것이다. 무대 구조물 위의 무용수들과 더불어 무대를 메우는 영상 역시 주제를 보여주는 장치다. 기억의 파편들이 존재하고, 사라지고, 불려오는 과정을 보여줘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상징의 집합체인 ‘몸의 언어’인 탓에 때때로 직관적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나, 작품은 상당히 친절한 편이다. 굳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따라가지 않아도 눈이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것이 강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흔히 떠올리는 무용의 경계를 넓힌다. 단체의 이름처럼 ‘화이트 큐브’ 안에서 피어난 번뜩이는 상상력, 그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방식이 흥미롭다. 이 무대에서 벌이는 무용수들의 춤은 장르의 지평을 넓힌다. 트램펄린으로 뛰어드는 몸짓, 철골 구조물에서의 지탱, 경사로에서 밀려나고 버티는 움직임은 복잡다단한 안무보다는 쉬운 동작처럼 보이나, 이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접어든 무용수들의 진화처럼 다가온다. 아쉬운 점도 있다. 모두가 진화를 완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대 위 일곱 명의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몸짓마다 진화의 단계는 달리 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