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까지ㆍ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것은 실화다. 2001년 9월 11일. 납치된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이 세계무역센터로 날아든 직후였다. 그 시각, 캐나다 뉴펀들랜드 소도시의 갠더 국제공항은 초비상 사태가 됐다. 미국 영공이 폐쇄,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들이 이곳에 불시착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 6대의 비행기가 착륙하고, 고작 1만 명 밖에 살지 않는 갠더에 38대의 비행기에서 7000명의 사람들과 19마리의 동물들이 도착한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해 개막해 막바지를 향해가는 ‘컴 프롬 어웨이’(2월 18일까지·광림아트센터 BBCH홀)는 9.11 테러 당시 갠더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이다. 원작의 대본과 작곡을 맡은 캐나다 출신의 아이린 산코프와 데이비드 헤인은 9.11 테러 10주년인 2011년 갠더를 찾아 현지인들과 비행기 승객들을 인터뷰하며 작품을 썼다. 부부 창작자인 두 사람은 2001년 당시 뉴욕에 살고 있었다.
뮤지컬은 5일간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간다. 무대 위엔 긴박감과 느슨함이 공존한다. 테러로 인해 각자의 목적지에 가지 못한 승객들의 불안과 공포, 지난한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교차가 촘촘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아비규환이 된 현장에서 한두 걸음 비켜서 있다. 2977명이 사망하고 2만 5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비극이자 21세기 현대사의 가장 핵심 사건이 된 9.11 테러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 된 5일간의 이야기로 시선을 확장한다.
갠더에는 스타일리시한 동성 커플, 테러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 아들을 둔 어머니, 중동 출신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 무슬림 셰프, 이혼 후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남녀, 수화물 칸에서 굶주리는 19마리의 동물들이 내린다. 테러의 현장에선 비켜갔으나, 이들의 존재 자체는 우리는 누구나 테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갠더 사람들은 인종, 언어, 문화도 다른 7000명의 이방인을 마음으로 품는다. 시종일관 넘치는 인류애로 아낌없이 그들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일상의 영웅’들이 만들어가는 ‘위대한 기적’이다.
이 작품은 기존의 뮤지컬 문법을 따르면서도 완전히 뒤바꾼다. 뮤지컬이라면 으레 생각나는 합창과 군무, 단합된 동선을 보여주나, 이를 구미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총 12명. 한 명의 배우가 최소 1인 5역부터 1인 10역까지 해낸다. 모두가 앙상블이자, 모두가 주조연인 무대라는 독창성이 무대를 빛내는 요소다.
특히 이 무대를 꾸미는 배우들이 쟁쟁하다. 뮤지컬 1세대 배우인 남경주 최정원을 필두로 서현철 고창석 장영주 신영숙 차지연 지현준 등 베테랑 배우들과 뮤지컬 무대에서 주목받는 젊은 배우들이 호흡을 맞춘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잠시도 한 눈 팔지 않아야 하고, 숨 쉬는 순간조차 나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역할을 소화해야 한다. 게다가 서로 간의 합은 핵심이다. 단체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장면이 많아 한 사람의 실수로도 모든 장면이 흐트러진다. 이들의 호흡엔 오점이 없다. 그간의 치열한 연습과 노력의 결과다.
구소영 음악감독은 프로덕션 노트를 통해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연기가 진짜 갠더 같다’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며 “그 시절 낯선 이방인들을 환대하고 최선을 다해 품었던 그들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기에 ‘여기가 갠더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작고 단출한 무대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영상으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무대가 확장하며 침엽수림이 펼쳐지고 갠더에서의 파티가 시작될 땐 잠시나마 비극을 잊는 환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위로 얹어지는 아이리쉬 음악은 이 뮤지컬의 백미다. 바이올린과 닮은 피들, 타악기 바우런, 작고 귀여운 만돌린에 아이리쉬 부주키와 휘슬이 어우러진 켈틱 음악이 소도시와 어우러지며 딱딱하게 굳은 관객들의 마음을 그 시절의 갠더로 이끈다.
‘컴 프롬 어웨이’는 지난 10여년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 했던 비극과 그 비극을 대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조건 없이 나눠주는 이들의 관대와 포용은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진상, 거대한 불행 앞에서 외로이 견뎌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줘 씁쓸한 감정도 안긴다. 그렇기에 이 뮤지컬은 좋은 작품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연대의 힘’을 알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