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9회> 붉은 태양을 따라서 (8)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거성그룹의 재벌2세는 모종의 비밀을 가슴 속에 혼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이 N-Dos 단의 우두머리에게까지 새어나간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모종의 비밀이란… 거성그룹 소속의 블루드라이브 기술 연구원들을 이번 5개국 관통 랠리 경기에 참여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이 새어나간 이유는? 유별나게 눈에 드러난 행동 때문이었다. 원래 재벌 후계자가 모색하는 일은 남의 이목을 끌게 마련 아닌가. 더구나 행동이 절제되고 허튼 소리라곤 입 밖에도 내지 않던 재벌2세가 어느 날 부터인지 블루드라이브 연구원들에게 랠리 카 드라이브 기술을 교육하고 있었으니… 의중이 들통 날 수밖에.
그 뻔한 비밀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사람은 우습게도 권도일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재벌2세가 어째서 1974년 산 치타를 중요한 랠리 경기에 투입하려 하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 하던 중이었다.
“아, 그러니까… 2세께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것이로군요.”
고급 요정 주차장에 멈추어 선 메르세데스 벤츠 600 뒷좌석에서 그는 재벌2세의 속내를 추궁했다. 재벌2세가 고급 요정에 차를 세웠다는 것은 사용자와 고용자 간의 관계를 벗어나 남자 대 남자의 관계로 탈바꿈하자는 자리라 여겼으므로… 배짱이 생겨난 까닭이었다.
“두 마리 토끼요?”
“하나는 대선주자의 부탁을 들어주어 5개국 관통 랠리를 성공시키는 것, 또 하나는 1974년 산 치타를 투입해서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것.”
“틀렸습니다. 그 두 가지는 아버님의 계획일 뿐이고요… 내가 권 전무를 요정으로 모시고 온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권도일 전무와 함께 오입을 하려는 이유는…”
오입?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표현이었다. 상대가 시정잡배도 아니고, 거대한 재벌가문의 후계자인데… 그의 입에서 함께 오입을 하련다는 말을 듣게 되니 머리카락마저 바싹 곤두설 지경이었다.
“자, 그런 이야기는 술이나 마시면서 천천히 나누기로 합시다.”
재벌2세가 메르세데스 벤츠 600의 문고리를 낚아채기도 전에 어느새 문 옆으로는 한복으로 꾸며 입은 마담과 조선시대 가마꾼 차림의 웨이터들이 마중을 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까지는 평범한 단독주택에 불과했는데, 막상 안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별세계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자, 이리로 오르세요. 서방님.”
서방님? 귓구멍에 닿기도 전에 살살 녹는 음성이었다. 어느새 몰려나왔는지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미녀들 서넛이 배꼽인사를 하는 중이었고, 어리둥절해서 정신 나간 듯이 서있는 권도일의 발밑으로는 평교자가 납작 대령해 있었다.
평교자라 함은 조선시대 정승들이 행차할 때 이용하던 운송수단이었다. 덮개가 없어 사방이 트인 것으로 4명의 가마꾼이 어깨에 메고 다녔는데, 정승이 앉는 자리에는 표범가죽을 깔고, 곁에는 가마덮개 (안롱)를 들고 가는 사람, 접는 의자(호상)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따르곤 했다. 그 당시엔 대략 20여명의 수행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안롱은 모든 관원에게 허용된 것은 아니고 3품 이상의 벼슬아치라야 사용할 수 있었다는데…
“정승이 앉던… 여기에 앉으라고요? 제가요?”
권도일은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재벌2세는 어느 틈에 평교자에 올라앉았는지 점잖게 두 다리를 꼬아 양반자세를 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잠깐 아는 체를 해보면… 2품 판서급 이상의 관리들이 타고 다니던 것으로는 초헌이 있는데, 외바퀴 위에 자리를 놓고 막대를 꿰어 사람이 끌고 가는 수레를 이르는 말이었다. 차라리 초헌에 오른다면 또 모를까…
재벌2세와 동급으로 평교자에 오르자니 권도일은 왠지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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