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31
파도소리가 멀리에서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가듯, 옥수숫대에 부는 바람이 그러하듯…애타는 한숨소리는 비행기 복도 뒤쪽에서 앞쪽으로 밀려오다가 다시 썰물처럼 뒤쪽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어째서 한숨소리가 오락가락하냐고?
신희영, 유호성이 앉아있는 좌석이 비즈니스석의 한중간이기 때문이었다. 강유리는 바로 그 좌석 옆에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와인잔을 내려놓기 위해 먼저 허리를 굽혔을 때, 이를테면 무릎을 곧추 세운 채 손바닥으로 땅 짚기 자세를 취했을 때엔 뒤쪽 이코노미석에서…으흑!
그러다가 스커트 터진 틈으로 허벅지를 드러내며 완전히 쪼그려 앉았을 때엔 앞쪽 비즈니스석에서…어헉!
그녀가 와인잔에 묻은 검불을 떼기 위해 엉덩이를 치켜세우자 저 멀리 이코노미석에서부터 단체로…으흐흑!
그녀가 은근슬쩍 방향을 바꾸자 이번엔 앞쪽에서 떼로…으흐흑!
윗도리 목 부분이 늘어지며 가슴 속이 들여다보이는가 싶으면, 저마다 침을 삼키거나 낮은 탄성까지 질러대며…으으음, 으흐흑!
가관이었다. 하지만 강유리는 그런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모든 상황이 작전대로 진전되고 있음에 그녀는 흐뭇했다.
상황이 무르익었고 더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그녀는 와인잔이 놓여있는 곳에서부터 뒤로 돌아 성큼성큼 스무발자국을 걸어갔다. 마치 결투를 앞둔 총잡이처럼. 그리고는 매니저 백광돌로부터 퍼터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퍼터를 품에 안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스프링이 감기듯 몸을 외로 꼬았다가 풀기를 서너 번, 그런 뒤에 길게 펼쳐진 비행기 복도 양탄자 위에 자그마한 골프공 한 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심호흡 한 번. 이제 필살기를 내보일 때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동작이었다.
“딱!”
그녀가 퍼터로 가볍게 공을 때렸다. 공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복도 앞쪽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승객이 모여앉아 있었지만 실내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 이 희한한 광경을 보기 위해 숨을 죽인 까닭이었다.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가 미처 말리지도 못한 사이에 골프공은 유유히 복도를 따라 굴러가고 있었다.
“땡그랑!”
어김없었다. 골프공은 복도 양탄자를 따라 조용히 굴러가더니 찰랑이는 와인잔을 땡그랑! 소리가 날 만큼만 건드린 뒤에 멈춰 섰다. 술은 한 방울도 넘치지 않았다.
그 뒤로 약 50㎝ 정도 간격을 둔 채로 두 번째, 세 번째 골프공이 굴러오고 있었다. 역시 어김없었다. 땡그랑! 땡그랑!
예상했던 대로 ‘브라보! 나이스!’ 어쩌고 하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직 손을 들어 화답하기엔 일렀다. 이럴 때일수록 포커페이스!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쯤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복도를 따라 와인잔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식사시간에 젖혀놓았던 그 커튼은 아직도 젖혀진 모습 그대로였다. 승무원도 커튼 따위에 신경쓰기보다는 이 희한한 퍼포먼스에 먼저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헉…어허헉!’
또다시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안타까운 한숨소리…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세 개의 공을 주워들기 위해 허벅지를 내보이며 쪼그려 앉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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