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 붉은 길, 푸르른 마음 (2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중국을 통해서 북한으로 들어가려면… 대부분 나선지역을 통하지 않습니까? 작년 여름인가요? 취안허(圈河) 세관 국경 맞은편에 있는 북한의 원정리 세관으로부터 나선 항 까지 이어지는 130리 길에 신작로가 뚫렸다던데요? 중국에서 북한으로 드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가요?”

“그런가 봐요. 장차 생겨날 중국의 인프라 투자에 대비해서 나선지역의 흙길 구 도로를 새롭게 포장한 모양입니다. 나도 북으로 가려면 으레 나선이나 옌볜(延邊)을 통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지요. 회령세관 앞에 뻗쳐진 다리는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가끔씩 비쳐주곤 하잖아요?”

“아, 싼허(三合)의 두만강 다리…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북한으로 가는 중국 화물차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단둥(丹東)을 통해 북으로 갈 것이란 말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왠지 간첩으로 북파 되는 것처럼 비밀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요…”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치권과 연계되어서 벌어지는 일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서로 잘 되자고 하는 일일 텐데…”

재벌 2세와 권도일은 마치 모의라도 벌이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아침 출근시간 직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에 두 사람은 넋이 빠져버린 상태였다. 겨우 4시간 여유를 주고 북한으로 갈 준비를 하라니…

“복장은 어떻게 갖춰야지요? 며칠간 머물게 될지를 알아야 몇 벌의 양복이 필요한지도 가늠할 텐데…”

“복장 뿐입니까? 골치 아픈 문제가 어디 한 둘인가요? 북한의 최고 권력자를 만나야 한다면서… 개별적으로 어떤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지,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비밀리에 전해야 할 밀서 같은 것이라도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한 점 투성입니다. 혹시…”

진지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다가도 권도일은 간혹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전화 한 통에 고무되어 대뜸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장차 국가보안법에 위배되어 곤욕을 치르게 되지나 않을지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카메라나 녹음기는? 혹시 몰래카메라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지, 그러다가 자칫 궁지에 몰릴 수도 있어요. 우리가 스파이 노릇을 하자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협상을 하러 가는 거지요?”

마음이 불안해서일까? 시간은 바람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높은 양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시각이 아침 8시 경이었고, 아무런 준비도 한 것이 없는데 벌써 시계바늘은 11시 3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권 전무님, 시간이 없습니다. 비서실에 긴급히 연락해서 와이셔츠와 넥타이라도 몇 벌 사오라고 부탁해주세요. 나는 총무이사와 캄보디아 출장 기획을 꾸미겠습니다. 권 전무님도 명심하십시오. 우린 엄연히 캄보디아 출장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지요.”

남은 시간은 불과 20 여분 안팎, 마음은 급했지만 이상하게도 행동은 굼뜨기만 했다. 비행기를 타야 하니 평소에 지참했던 만년필의 잉크를 빼내야겠다는 생각, 혹은 빅토리녹스 손톱 칼이나 동전 등등을 주머니에서 털어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 그렇지만 스마트 폰의 배터리는 오히려 두어 개 쯤 여분으로 충전해서 가져가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를테면 잔뜩 긴장된 상태였다는 말인데…

‘빅-삑! 오후 7시 워커힐, 코-드라이버 미팅’

마침 그 순간 메모리 기능이 탑재된 권도일의 스마트 폰이 신호음을 보내며 미리 예정되어 있던 저녁약속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코-드라이버… 그렇지, 권도일은 오늘 오후에 김지선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몬테카를로 랠리를 마치고 이스라엘로 급파된 이후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므로… 오늘은 얼굴 맞대고 변명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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