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18
신희영이 모셔오기로 한 골프코치가 정말로 유리 코턴의 직속제자라면… 그나마 뒷걸음질 치다가 쥐 꼬랑지라도 밟은 것처럼 운이 좋은 셈이었다. 바람 심하기로 유명한 그의 고향 카누스티에서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던 1937년, 그 당시엔 영국인 중에서 그 누구라도 우승을 하리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엔 미국 골퍼들이 펄펄 날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현지에서 6년 전에 우승한 ‘토미 아머’에 이어 당당히 두 번째 브리티시 오픈 타이틀을 꿰어 찼다.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치던 최악의 날씨 속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80타를 기록하기도 힘들었는데 말이다.
“더구나 헨리 코턴의 최종라운드 스코어는 71타였단 말이다. 브리티시 오픈 사상 가장 기억될 만한 라운드였다고.”
“그게 엄마가 말하는 코치… 유리 코턴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 사람의 직속, 또 직속, 또… 또 직속 제자라니까? 아무러면 돈만 밝히는 것들과 같을라고? 성씨도 같은 ‘코턴’이란 말이다.”
신희영은 헨리 코턴의 전설을 이어받았음에 분명한 유리 코턴을 찰떡처럼 믿고 있었다. 하긴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코스로 정평이 나있는 카누스티에서 헨리 코턴은 26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퍼팅 수를 기록하여 영국인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런 유명한 선수의 실력을 이어받은 제자라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는 뜻이었다.
“무조건 투 퍼팅에 성공해도 36타는 나오게 마련인데… 26타를 기록했다는 건 귀신도 찜 쪄 먹었을 사람이지.”
하여간,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돼 유호성은 영국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유리 코턴의 수제자가 되어야만 했다. 사실, 코치로 유명한 사람은 헨리 코턴이라기보다 토미 아머였다. 토미 아머는 코턴보다 6년 이른 1931년에 처음으로 고향 카누스티에서 개최된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바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그는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뒤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명한 코치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차라리 토미 아머 선수의 직속제자, 또 직속제자…의 아들, 손자를 골프코치로 모셔왔다면 어땠을까?
“혹시 종일토록 퍼팅만 가르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구멍이 보이는 곳 어디에서건 단 한 번의 퍼팅으로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아? 짧은 홀에선 무조건 버디, 긴 홀에서도 웬만하면 버디를 잡지 않겠니?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 돈방석에 앉는 거야.”
“아이고, 엄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이 녀석아, 아무러면 자동차 운전수보다야 못하겠니?”
“자동차 운전수가 아니라 머신 드라이버라고요.”
“엎치나, 메치나… 똑같은 말이지.”
신희영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상 일은 거침없이 진행돼 갔다. 그녀는 인터넷으로 영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유리 코턴을 찾아내어 즉석에서 섭외를 했다. 유리 코턴은 영국 내에서 교습을 하면 월 5000달러, 외국에서 교습을 할 경우 월 7000달러에 교통비와 숙박비, 식비를 함께 제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호성아, 아무래도 네가 영국으로 가야겠다. 그 작자 비행기 표에 숙박비, 식비까지를 어떻게 감당하니?”
“강유리 선수는 미국으로 가고, 나는 영국으로 가면… 엄마가 관리하기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강유리와 내가 함께 몰려다니며 연습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유호성은 이렇게 물었다. 아니, 물었다기보다 강요한 것과 같았다. 자칫하다 강유리와 헤어지게 되는 날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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