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12

유민 회장은 높은 양반과의 통화내용으로 인해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남들에겐 새가슴 혹은 뻥쟁이로 오해받을 만도 했다. 전화기를 통해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 흘러나오던 그 순간에 하필 그녀가 다이아반지를 들어보일 건 뭐람.

“이 반지 어때요? 사주실 거죠?”

“어…네, 네.”

“요건 어때요? 조금 비싸 보이긴 하지만.”

“아, 네…그거요? 네.”

누구와 전화통화를 하는지 몰라도,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집어들 때마다 유민 회장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식은땀까지 질질 흘리는 기색이었다. 통화 중에도 가격표를 따라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츠 베리 나이스 링…’ 어쩌고 하며 늙은 판매원이 그를 부추겼지만 어느새 양은혜의 심기는 잔뜩 어긋나 있었다. 세상에 무슨 남자가 이래? 침대에서와 밖에서의 마음상태가 어쩌면 이리도 완연히 다를까. 침대에 들어설 때엔 티파니의 보석을 몽땅 사줄 것 같더니, 막상 다이아 가격표를 보더니 마음이 변했단 말인가.

“아일 바이 이츠 올~댓!”

그녀는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팔을 벌려가며 ‘올~’이란 단어를 아주 크고 길게 발음했으니,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몽땅’ 사겠다고 내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드라마틱해지자 그동안 응대해왔던 늙은 판매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한국어에 능통한 젊은 아가씨가 매장으로 달려 나왔다. 이른바 봉이 떴으니 상대쪽에서도 대작을 하겠다는 의지였을까.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색다른 다이아 반지를 골라 턴테이블 위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역시 리치스탄은 보는 시각부터가 남달라요. 돈으로 명예를 구입할 줄 아신다는 거지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이 세상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모님께선 바로 그걸 찾아내셨어요. What money can’t buy!”

젊고 어여쁘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그 매장아가씨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어느새 동그란 반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 반지에는 엄지손톱만이나 한 다이아가 굳건히 박혀 있었으니…광채, 색깔, 모양새 등으로 보아 그 가격은 물어보나 마나. 듣는 순간 기절하기 십상일 터였다.

“좋아요, 반지는 물론이고…세트로 구성된 목걸이, 귀고리는 없나요?”

“아, 네. 역시 사모님께서는 ‘사랑의 경제화’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세요.”

“사랑의 경제화? 참 멋진 말이군요.”

“Economizing Love! 경제학자 케인스의 제자인 데니스 로버트슨 경이 컬럼비아대학교 200주년 기념행사 강연에서 언급한 말이지요. 이젠 경제활동에서도 인간의 숭고한 동기를 염두에 두어야 할 때입니다.”

“아! 참 멋있어요.”

“사모님은 더 멋있어요. 그리고 용감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요? ‘우리는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고요.”

미모의 젊은 여점원은 여자의 허영심을 부풀리는 데 지적인 기여를 하는 중이었고, 양은혜…그녀는 뭣도 모르는 채 육갑을 떠는 중이었다. 보석반지 하나 사기 위해 태평양까지 건너온 것이 허파에 바람이 든 결과라면 몰라도 경제학 개념에 익숙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케인스, 로버트슨,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들먹이던 그 여점원이 막상 계산을 하려 했을 때, 지불 담당자인 유민 회장의 낯빛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알리바바 더보기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