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바람 부는 길(24)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제임스 리 박사께서는 이라크에 살고계십니다.”
“이라크? 이라크 어디에요? 분명히 살아있기는 한 것입니까?”
“시리아 사막 동북쪽… 안나자프에 계십니다.”
권도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 속이 메말라서 마치 모래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걸 어째야 하나? 거성 자동차그룹의 재벌 2세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고 당시에 실종으로 발표되었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살아있을 가망은 없다고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리 박사가 살아있다면…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라도 그를 만나는 것이 새로 도출된 모범 답안이었다.
“나도 박사를 만나고 싶소. 하지만 잠시 후, 새벽 여섯시에 이스라엘 ‘어번’사의 직원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시끄러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권도일이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거성자동차의 연구팀이 이스라엘 군 당국과 비밀리에 얽혀져 있다는 걸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의 첩보능력은 뛰어나지요. 하지만 의외로 단순한 곳에서 허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감히 당신을 납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납치 되었습니다.”
납치라니… 끔찍한 표현이었다. 그들은 마치 농담을 하듯 덤덤하게, 때론 얼굴에 웃음을 머금어가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도일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한 그대로 지금 그는 납치당한 처지가 분명했다.
“나에게 왜들 이러는 겁니까? 나는 몇 시간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과 만나기로 되어있단 말입니다. 만약 응급실에 내가 없으면 일이 복잡해진다고요.”
“걱정 마세요. 새벽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선생과 비슷하게 닮은 사람이 그 응급실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으면 그 사람은 권도일이라고 대답하겠지요. 즉 그 남자가 당신 대역을 맡을 거란 말입니다.”
“나를 닮은 사람이 내 대역을 맡아 해요?”
“그렇소. 그 사람이 새벽 여섯시에 이스라엘 어번 사의 직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은 우리와 함께 국경을 넘어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게 될 것입니다. 안나자프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제임스 리 박사가 당신을 기다리십니다.”
“제임스 리 박사도 당신들이 납치했군요.”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얽히게 되었을까. 권도일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거성그룹 재벌 2세의 뜻에 따라 거성 레이스 팀에 합류한 것부터가 잘못인 셈이었을까? 아니다… 아버지 권일주가 창업한 회사 ‘블루아우토’를 유민 회장이 M&A 한 것으로부터 사달이 나기 시작했으니 원초적인 잘못은 아버지 권일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납치라는 표현이 심히 거슬리는 군요. 우리는 남들 협박이나 일삼고 납치극이나 벌이는 싸구려 폭력배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랍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입니다. 아랍권의 여러 토호세력들이 우릴 지원하고 있답니다.”
그들은 마치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내용을 새겨 들어보면 그들은 자기네들이 누구이며 어째서 아랍의 번영을 위해 목숨마저 바쳐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세세히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 대역놀이에 과연 이스라엘 군 당국이 속아 넘어갈까요?”
“속나 안 속나 내기할까요? 허허허! 이스라엘 친구들은 한국 사람들 얼굴을 절대 분간하지 못하더라고요. 한국인들 눈이 찢어졌다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낸 대역이 훌륭하게 당신 역할을 해낼 겁니다.”
그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껄껄 웃고 있었지만… 분명히 납치를 감행하는 중이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