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끝까지, 죽을 때까지 (22)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역시 비즈니스맨에게는 술집이 창조와 소통의 공간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역이 시작된 지 45년 만에 1,000배의 물량, 즉 무역액 1조 달러를 벌어들이게 된 비결 중에 술집에서 나눈 창조적인 소통도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술을 매개로 한 적극적인 만남… 참 좋지요. 서로 이렇게 마음이 오고 가야 술도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법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유민 회장님께서 원앙이나 잉꼬처럼 살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려.”
“원래 수컷 잉꼬가 바람을 엄청 피운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집은 여자가 바람이 들어서 난리를 피웁니다. 하긴… 말로 퍼주고 되로 받는 격이긴 하지만…”
“허허허! 회장님 젊은 시절에… 여성편력이 대단하셨지요? 사모님께서 참다못해 반기를 든 것이로군요?”
“다 지나간 일은 따져서 뭐하겠소? 취하기 전에 좀 더 창조적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래, 상무님 사촌동생이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따 놓았다고요? 그 광산 규모가 어는 정도나 되는지…”
“전체적인 규모는 잘 모르겠지만 채굴권을 담보로 은행에 맡기면 800장 정도는 융자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800장! 이 말 한 마디에 유민 회장은 여태껏 마신 술에서 번쩍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800장이라면 800억 원을 뜻하는 말 아니겠는가… 그것도 따끈따끈한 현금으로!
“으흠! 800장 정도면 5개국 관통 랠리경주를 벌이기까지 느긋하게 돌릴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민 회장님.”
방송사 상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유민 회장의 앞에는 석 잔의 폭탄주가 겹으로 놓여 있었다. 자! 마셔라. 실컷 마시고 타협을 하자! 대충 이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를테면 방송사 상무가 권하는 술잔은 방금 화덕에서 꺼낸 감자와 다를 바 없었다. 허겁지겁 받아먹으면 입에 온통 화상을 입을 게 뻔했다. 그러나 당장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할 입장이었으니…
“좋습니다. 어느 정도를 추가로 쏘아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따블이면 족합니다. 따블! 참 아름다운 말이지요. 택시를 잡을 때에도 따블!만 외치면 즉빵이고, 내기골프에서도 따블!을 부르면 잃은 돈을 즉시 만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방송사 상무는 화통하게 웃어제꼈다. 따블! 하지만 유민 회장은 고스톱 판에서 피바가지를 쓰고 두 배로 돈을 토해내는 억울한 심정이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친필 사랑의 연서가 담긴 팬티를 확보해 놓은들, 800억 원을 쥐고 있는 사촌 여동생이란 비장의 카드 앞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으음~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대신 사촌 여동생부터 소개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순서가 그렇게 되어야지요.”
“하지만 사촌동생이 저를 싫다고 하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진작부터 그 아이의 의중을 떠보았습니다. 그 아이도 꽤나 외로워 하더군요.”
방송사 상무와 유민 회장과의 취중진담, 창조를 전제로 한 소통은 대충 이렇게 이루어졌다. 둘은 서로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처를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유민 회장은 뜨거운 감자를 통째로 삼키기 위해 입을 델 각오를 해야만 했고, 방송사 상무 역시 화덕에서 뜨거운 감자를 맨손으로 꺼내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별러야만 했던 것이다.
“서로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는데… 어울릴까요?”
“어울리도록 만들어야지요.”
둘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창조를 전제로 한 술집에서의 소통은 사실 고단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계략으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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