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날개에 숨긴 칼 (37)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부터 권도일은 고급주택이 줄지어 선 성북동 입구 비탈길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거성재벌 2세가 살고 있는 동네였다. 그 일대의 고급주택을 출발하여 시내로 향하는 승용차는 오로지 이 비탈길을 통과해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곳, 이른바 길목을 지키고 서서 거성재벌 2세의 승용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왕 못 먹을 감이지만 찔러보기는 해야지.’
어젯밤, 도종호와 송달민에게 1974년 산 치타가 회장님 댁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밤새 별러온 참이었다. 언감생심, 감히 거성 회장님 댁으로 직접 찾아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2세… 그의 아들이라도 만나 구원요청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저도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서 나름대로의 아성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동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권도일씨! 저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똥차를 몰고 랠리에 나가서 승리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주세요. 그런 연후에 크리스 뱅글을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우리 셋이서 새로운 장사를 도모해 봅시다. 우리 셋이서 말입니다.’
언젠가 거성재벌 2세와 직접 만났던 날, 그는 이렇게 부탁하지 않았던가. 권도일은 그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게릴라처럼 출근시간에 맞추어 길목을 막고 있는 것도 그 말을 기억하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의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빵빵~”
클랙슨 소리와 함께 재벌 2세의 검은 승용차가 멈추어 서자 권도일은 차를 가로막은 채 그 자리에서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중한 인사를 받았으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재벌 2세는 차 문을 열고 직접 밖으로 나와서 권도일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권 전무님 아니세요? 이토록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십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비밀 사안인가요? 회사에서 만나면 될 것을… 하여간 차에 오르시지요.”
역시 젊은 재벌은 신선했다. 그는 권도일을 옆자리에 앉히더니 조작단추를 눌러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를 방음유리로 차단시켰다. 이제 승용차 뒷좌석은 온전히 둘 만의 비밀공간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회사에서는 도종호 상무의 눈치가 보여서 이렇게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아, 도종호? 그 양반은 아버님의 직속 라인이지요. 그래서인지 저도 조금은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여간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공손하고 호의적인 재벌2세의 태도에 권도일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움을 느꼈고 차제에 술술 요구사항을 털어놓았다. 재벌 2세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애초부터 자길 찾아오지 않은 것을 오히려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쓸데없는 고생을 하셨군요. 1974년 산 치타는 아버님 댁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한이 깃든 차라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지요. 모르긴 해도 그 차를 함부로 내돌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잘 말씀드려 보지요.”
“한이 서린 차라니요? 무슨 기막힌 사연이라도 담겨있습니까?”
“아버님께서 5대륙 관통 랠리경기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연장선 안에 있습니다. 이미 37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아버님의 가슴 속엔 친구가 죽어가던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을 테니까요.”
승용차는 어느새 광화문 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방음유리가 드리워진 건너편에서 운전기사는 묵묵히 핸들을 돌릴 뿐,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보였다.
“37년 전, 아버님은 파리 다카르랠리에 출전한 드라이버였습니다. 자동차 경주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던 그 시절에… 돌이켜 보면 참 용감한 분이었지요.”
재벌 2세는 문득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담배를 피워 문 직후였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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