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6회> 붉은 태양을 따라서 15

갓끈이 호박으로 장식되어 있다면 정2품 이상, 말 그대로 대감들이 쓰던 갓임에 분명했다. 더구나 거기에 금패마저 붙어 있다면 갓 주인의 지체가 얼마나 높을까에 대하여는 알아서 짐작해야 했다. 그런데….

참대쪼가리를 이어 만든 갓끈이 달렸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 그 갓의 임자가 정2품 이상의 대감이긴 고사하고 백수건달이 아니면 다행이란 말이겠지.

“대감, 이 갓을 어느 분이 쓰시렵니까?”

마담은 호박끈에 금패가 붙어 있는 갓을 두 손으로 받쳐든 채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재벌 2세의 머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 마담들이란 눈치 빼면 수염만 남는다고 했겠다? 셋 중에 가장 지체 높은 사람이 재벌 2세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천지가 다 아는 사실이긴 했지만….

“자, 이걸 쓰시와요. 참, 내 정신 좀 봐. 갓을 쓰시기 전에 망건부터 쓰셔야지요?”

그녀는 보따리를 뒤져 망건 하나를 꺼냈다. 망건이란 갓을 쓰기 전에 쓰는, 이른바 속모자였다. 원래 대감들이 쓰는 망건에는 도리옥 관자가 달려 있는 법. 그녀가 새로이 받쳐든 망건에는 역시 매끈한 도리옥 관자가 붙어 있었다.

“어험, 폼나게 한 번 볼까?”

“자, 자… 어머나, 멋지기도 해라.”

“원래 계획은 치마폭 아래에 누운 상태에서 아가씨들에게 싸이의 말춤을 추게 하는 것이었소. 그래야 신이 날 텐데…. 지금이라도 춰볼까?”

“대감! 벌써 주안상이 들어왔잖습니까? 싸이의 말춤은 이따가 상을 물리고 나서 흐드러지게 추기로 하고요…. 우선 갓 임자부터 정해주셔야지요.”

“그럴까? 그럼 이 갓은….”

어느새 도리옥 관자에 호박끈 갓을 뒤집어쓴 재벌 2세가 예의 참대끈이 달린 싸구려 갓을 집어든 채 말을 이었다. 권도일과 유호성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둘 중의 하나는 그 싸구려 갓을 써야만 할 모양이었는데….

“권도일 전무가 쓰시오. 왜냐하면….”

그는 권도일을 향해 갓을 내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 질문에 대한 권도일 전무의 답이 너무 앞섰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1974년산 치타를 몰기 위해서는 한 명의 드라이버만 필요합니다. 나머지 한 명은 코-드라이버, 즉 보조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열이 정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번 5개국 관통 랠리의 드라이버는… 유호성 선수로 정하신 겁니까?”

권도일은 유호성과 재벌 2세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순간 유호성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뿔싸… 이게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일까?

“그렇습니다. 나는 유호성 선수의 드라이브 실력을 믿고 있습니다. 랠리 경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는 기질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붉은 팬티를 보고 붉은 팬티라고 답한 유호성 선수의 손을 들어준 셈입니다.”

“랠리 경기와… 팬티를 보고 팬티라고 대답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 아닐까요?”

“그 얘긴 그만 합시다. 이미 서열은 정해졌어요. 내가 권 전무를 아가씨 가랑이 속으로 들이민 원래의 의도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권위와 가식을 버리라는 일종의 충고였습니다. 권 전무는 왜 그런지 몰라도 늘 딱딱하게 굳어 있더군요. 나는 날것 그대로의 권 전무를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재벌 2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권도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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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