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4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2

모든 번뇌가 단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될 수도 있는 법이다.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한 한마디 말이 이리저리 가슴속을 맴돌다 보면 회오리처럼 그 위력이 커져 종내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어이쿠, 에휴~.”

유민 회장의 한숨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어쩌자고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질끈 감은 그의 눈꺼풀이 마치 영사막이나 되는 것처럼… 옛사랑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불러봐요, 내 이름을!”

“좋아요… 유민 오빠!”

이게 뭔 소리냐 하면… 겨우 1년쯤 전에 생생하게 벌어졌던 리얼리티 쇼의 한 대목이었다. 그러니까… 강유리의 미모에 반한 유민 회장이 그녀를 비밀집무실 앞 주차장으로 가까스로 꼬여냈을 때, 유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앙증맞은 입술로 데굴데굴 굴리듯이 ‘유민 오빠’를 읊어대곤 했었다. 곰곰 기억을 되살려보니… 유민 회장은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기까지 하지 않았나.

“쑥스러워요, 회장님! 하지만 회장님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마치 탤런트와 몰래 연애하는 것만 같아요.”

그날 강유리의 이 한마디에 유민 회장은 쓸개까지 녹아내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부적절한 관계를 위해 주로 사용하던 비밀집무실 앞 주차장, 그 한적한 곳에 세워진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서 유민 회장은 그녀의 젖가슴을 한껏 움켜쥔 채로 으흥~ 으흥~ 사랑니 앓는 소리를 연발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기억이 아직도 유민 회장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는데…, 이런 세상에! 뭐가 어쩌고 어째? 호성 오빠?

“이것 참 미치겠군. 그래서 여자는 요물이라고 하는 건가?”

유민 회장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촌수를 세기 시작했다. 비밀집무실 앞 호젓한 주차장에서 그녀는 분명 ‘유민 오빠’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방금 날아 들어온 동영상을 보니 그의 아들인 유호성에게도 ‘호성 오빠’ 어쩌고 하며 코먹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아무에게나 오빠라고 하면 촌수가 어떻게 되냐? 내 이년을 그냥!”

유민 회장은 이를 앙다물고 일어나 대충 세수하고 옷부터 챙겨 입기 시작했다. 당장 강유리가 전지훈련차 떠난 남아공으로 뒤쫓아갈 요량이었다. 반은 분노, 나머지 반은 질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남아공으로 향하게 한 원인은 가슴 가득한 근심 때문이었다. 사업을 거덜 낸 자의 근심!

유민 회장은 아침식사도 굶은 채 차를 몰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으나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발레파킹을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즉석에서 남아공으로 향하는 대기표라도 구할 참이었다.

사파리와도 같은 세상에서 유민 회장, 파파라치, 강준호 등등의 맹수들은 이렇게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유리는 파파라치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 토끼와 다름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초식동물.

‘흐흐, 강유리… 너의 생사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어. 우선 너를 앵벌이로 삼아 돈부터 벌어들인 후에 보자고.’

이건 1등석 화장실 앞에서 강유리를 기다리는 파파라치의 심정이었고,

‘강유리,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당장 요절을….’

이건 유민 회장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강유리의 단수는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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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