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6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44

메르세데스 벤츠는 유리판 위를 미끄러지듯이 굴러갔다. 홀로 그 차에 오른 권도일은 너무도 고요한 실내 분위기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이러할까? 혹은 막 숨을 거두는 찰나가 이러할까?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차단 유리창이 스르륵 열리며 섬뜩한 북한말이 흘러나왔으니 놀랄 수밖에.

“반갑다고 인사하잖소?”

“누구…십니까?”

“나는… 장차 권도일 동무와 운전솜씨를 겨루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권 동무… 운전방면에 실력이 상당히 뛰어납디다. 얼마 전에 몬떼깔로에서 상 타는 모습을 활동사진으로도 봤소.”

승용차의 앞좌석과 뒷좌석을 차단하고 있던 유리창은 활짝 열렸지만 그는 북한 요원의 뒤통수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것일까? 그 요원은 매우 반가운 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뒷모습만으로는 진심을 알아낼 수 없었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선생께서도 경주차를 모는 레이서인가요? 아 참, 여기서는 영어를 쓰지 않으니… 레이서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뭐, 운전수면 어떻고 레이서면 어떻습네까? 열심히 달려서 조선인민의 본때를 보여주고 외화벌이에 앞장서면 되는 거 아니겠습네까?”

“아! 그렇지요. 조선 인민의 본때!”

“듣기에… 구라파에서 유독 경제난에 시달린다는 에스빠냐에서는 인민들이 속도차 경주를 중지하라고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오. 권도일 동무는 그 점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오? 속도차 경주가 돈벌이에 좋은 수단 아니겠소?”

북한 요원은 강요하듯이 물었다. 사실 권도일은 적잖이 놀라는 중이었다. 국내외 뉴스라고는 깜깜 무소식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곧 스페인에서 열리게 될 F1 경기에 관한 소식은 물론, 경제난에 시달리는 스페인 국민들이 F1 경기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다.

“속도차 경주라는 게 아마 F1경기를 일컫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F1 경기야말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축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월드컵 경기보다도 훨씬 가치가 높습니다.”

“동무 생각이 맞소.”

“좀 전에 선생께서 나와 운전솜씨를 겨루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선생은 북한의 자동차 경주 선수인가요?”

“그렇소. 우리 속도차 운전수들은 여기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습네다. 중국인들 틈에서 아무리 애써 봐야 달에 2000위안 벌기가 고작인데… 우린 장차 수백만 딸라를 벌어들일 각오가 되어 있단 말입네다.”

“아, 그렇군요.”

권도일은 드디어 북한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잠깐 사이에 우리 측 보안요원에서 중국 측 요원으로, 그러다가 곧 북한 요원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한국 땅에서 중국 땅으로, 드디어는 북한 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꿈같았다.

마침 그 순간 메르세데스 벤츠는 커다란 콘크리트 교량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차창이 암록색으로 짙게 선팅이 되어 있는 데다가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으므로 확연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교량은 반쪽이 푸른색, 나머지 반쪽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푸른색이 칠해진 곳에서… 이제 붉은색 쪽으로 들어가는 군요.”

차량이 붉은색 라인을 밟는 순간 북한 경비병이 날아갈 듯이 승용차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렇게 권도일은 북한 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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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