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붉은 길, 푸르른 마음 (2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자, 오늘 중으로 떠나십시오.”
“오늘? 준비도 없이 떠납니까?”
“이미 마음속에 그득한 말을 전하고 오시라는 겁니다. 토론을 하거나 협상을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 놓고… 김정은 위원장의 승인을 받아오십시오.”
“어디로 어떻게 통과해서 들어갑니까?”
“네 시간 후, 정각 12시에 호송해드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높은 양반의 전화는 언제나 메마른 지푸라기 같았다. 낮은 톤으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곤 했다. 하지만 톤이 낮고 메마른 목소리라고 해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오늘 가야한다고 했으니 오늘 가야만 할 것이다. 지금은 오전 8시. 준비할 틈은 겨우 4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말씀 주신대로 저와 권도일 전무… 둘이서만 가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회사 내부에는 물론 가족들에게까지도 비밀, 잊지 않으셨지요?”
“공식적으로 오늘부터 4일 간 캄보디아 출장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어떻게 둘러대셨습니까?”
“캄보디아 자동차정비업계를 둘러보는 것으로 알려놓았습니다. 우린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해서 북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알려주십시오. 불안해서 입이 바짝 마를 지경입니다.”
“허허허… 불안하시기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인들 다르겠습니까? 재벌은 전 세계 어디에서건 재벌일 뿐입니다. 재벌에겐 아무도 해코지하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이 시대의 역설인 셈입니다.”
“결국 알아야할 일 아닙니까? 우린 어디로 어떻게 해서 북으로 가는 겁니까?”
“좋습니다. 설명 드리지요. 정각 12시에 정보요원 두 명이 거성그룹으로 찾아갈 것입니다. 회장 집무실에서 그들을 맞으십시오. 그곳에서 5분에 걸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출발! 현관 앞에 세워진 승용차를 타고 서울공항으로 갑니다. 서울공항은 도심 한 복판에 있지만 보안이 잘 되어 있어서 기자들을 따돌리기 십상입니다.”
“아, 그렇군요. 서울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군요.”
“그래서 단둥으로 갑니다. 단둥에 내리시면 우리 정보요원은 되돌아오고, 현지 중국에 거주하는 보안요원으로 교체됩니다. 역시 두 명… 그들과 함께 승용차로 다리를 건너 월경합니다. 다리 중앙에서 보안요원은 되돌아오고, 두 분은… 북한 요원에게 인계될 것입니다. 그 뒤로는 알려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재벌 2세는 가끔씩 짧은 외마디 대답과 함께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아무래도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높은 양반과의 통화는 끝났고 이제 북한으로 떠날 일만 남은 셈이었다.
“우리가 개발 중인 X-호크 프로젝트가 아랍의 무장 세력으로 인해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는 걸 북에서도 알고 있을까요?”
권도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재벌 2세의 속마음을 후련하게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제임스 리 박사를 만난 사실 조차도 그는 반신반의할 뿐, 온전히 믿지 않는 듯했다. N-Dos 단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 것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답답한 쪽은 오직 권도일이었다.
“어떻든 간에 X-호크 개발 중단 의사를 밝혀야만 하겠지요. 그 대신 5개국 관통 랠리 팀이 북한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는 협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손해가 매우 큽니다.” 재벌 2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을 처음 전해들은 권도일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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