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끝까지, 죽을 때까지 (27)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총지배인이 되돌아가자 여태껏 조용히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신이 나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브라보! 브라보! 그들은 백광돌을 향해 이렇게 외치더니 이내 브라바! 브라바!를 연호하며 강유리를 에워싸기 시작했던 것이다.

“브라보, 브라바… 난리 났군. 저 양반들은 깡통에 계속 공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이걸 어쩌지?”

백광돌은 어쩔 줄 몰라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강유리는 의외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통조림깡통이 묻힌 곳을 향해 다시 에이밍하기 시작했다.

“어쩌기는요? 지상 최고의 골퍼가 지켜보고 있는데… 이런 기회가 평생에 또다시 찾아오겠어요? 이런 순간에 냉혹해지지 않으면 승부사가 될 자격도 없는 거예요. 오빠도 심호흡 한 번 하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으세요.”

역시 강유리였다. 아버지 강준호로부터 투철한 정신교육을 받고 자란 탓인지, 혹은 타고난 승부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절체절명의 이 순간에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내려고 작심한 모양이었다.

“아! 대단하다. 강유리….”

“인생을 특급열차로 갈아타는 중이라고만 여기세요. 모든 잡념을 버리고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무념무상!”

강유리는 이미 무(無)의 경지를 경험한 바 있었다. 무의 경지 역시 감각에 불과한 것.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한정 불가사의한 힘으로 귀결되는 신비로운 감각. 그녀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아마 창문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타이거 우즈도 숨을 멈추기는 매일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이던가? 마스터스 4라운드에서 한 타 차로 그를 뒤쫓던 디마르코의 추격을 벗어나려 할 때, 그 역시 무의 경지를 느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런 경지에 들지 않고서야 어찌 빙판 같은 오거스타의 그린에서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공을 굴려 홀인시킬 수 있었을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여겨지는 순간 백광돌의 눈앞으로 조약돌만이나 한 골프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리가 휘두른 웨지가 잠시 반짝 빛을 토해낸 직후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생전 교회나 성당이라고는 문턱에도 가지 않았던 백광돌이 어째서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생각했을까? 절체절명! 왠지 실수하면 큰일 난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를 신 앞으로 인도한 것일까?

“브라바! 브라바! 나이스 샷!”

천만다행이었다. 주위에서 번쩍이던 수백 개의 눈초리는 아마도 공의 행방을 좇아 통조림깡통 속으로 모여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그마한 골프공. 모나코 산간지방을 비추는 석양빛을 받아 핑크빛으로 날아오던 그 조그만 공은 딸그랑! 소리를 내며 정확히 깡통 속으로 안착한 것이다. 108mm 직경의 구멍. 인간의 108번뇌를 담고 있는 그 작은 구멍 속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맙다, 유리!”

백광돌은 신이 났다. 그러나 고맙다고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고맙겠지. 이제 잠시 후면 인생이 180도 달라질지도 모르니 고맙기 그지없을 테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리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의 욕망은 오로지 단단히 움켜잡은 웨지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은 인생의 포인트를 겨냥하고 있을 뿐, 그 포인트를 정확히 찔러주기까지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어야만 할 터!

유리가 쏘아올린 세 번째 공이 허공에 반짝이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딸랑! 하고 통조림깡통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6미터쯤이나 될까? 유유히, 그러나 거침없이 날아온 그 공은 깡통 속에서 핑그르르 돌며 남아 있던 힘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성공이로군! 백광돌은 그 공을 끄집어내며 또다시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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