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 끝까지, 죽을 때까지(2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그러나저러나 회장님께선 벌써 며칠 째 외박을 하시니 어쩌십니까? 사모님께서 아무 말씀도 않던가요?”

방송사 상무는 양주 한 잔을 단숨에 쭉 들이켜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며칠 째 함께 밤을 새우다보니 유민 회장의 인간적인 사생활이 자못 궁금하기도 했던 까닭이었다.

“아! 내 마누라요?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오래 되다니요?”

“물증은 없되 심증은 있다는 말… 딱 그 짝입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라는 말로 빗대어도 좋고요.”

“그럼 혹시 별거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에요. 사십년 넘게 한 이불 덮고 살아 온 여편네가 언제부터인지 아예 원수로 돌아섰지 뭡니까? 당장에라도 이혼부터 하고 싶은데… 수중에 돈이 없어서 갈라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하긴 위자료 문제가 크겠군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겠지요, 물론.”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나중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했던가? 철저히 사업으로만 얽혀있던 유민 회장과 방송사 상무 간에 그나마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온전히 술에 취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취중 진담! 아무리 술에 취해도 서로 이익이 되는 일에는 계산을 깔게 마련이었다.

“회장님 정도 재력가에겐 이혼이 그리 큰일도 아닙디다. 돈이야 어느 정도 나눠준 뒤에 또 벌면 되는 것이고… 오히려 싱글이라고 소문나면 젊은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뭐.”

“허! 상무님도… 이 나이에 젊은 여자와 산들 골치만 아프지요. 나는 다른 재벌들처럼 연예인이나 밝히고 젊은 애들이나 데리고 사는 따위엔 흥미 없습니다. 너 댓살 정도 차이 나는 선이라면 모를까…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사업을 마음 깊이 이해해주는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아내와 이혼을 결심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방송사 상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취중에 서로의 사생활을 이야기 하는 중에도 철저히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5개국 횡단 랠리 중계권을 놓고 수십 억대의 흥정을 벌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예 유민회장을 뼛속까지 우려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회장님 결심은 확고하십니까? 확실히 이혼하실 거라면 홀로 남아 상처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지요.”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유비무환!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있으려고요? 마침 나이 마흔 여덟이 되도록 시집도 가지 않고 혼자 사는 내 사촌동생이 있습니다. 직업이 로비스트인데… 국제적으로 크게 놀고 있습니다. 미모도 빼어나지요. 요즘엔 러시아를 오가며 비철금속과 우라늄 광산 채굴권을 확보했다고 하더군요. 회장님께서 제련사업을 하시니 한 번 만나보면 서로 간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려.”

“비철금속 광산 채굴권이라고요?”

“네, 아연과 카드뮴, 그리고 뭐라더라… 하여간 국제적으로 크게 노느라고 시집도 못 갔는데 언젠가부터 결혼할 생각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미모가 뛰어나서 인기가 사뭇 좋지요.”

“그래요? 그렇게 예뻐요? 나이가 마흔 여덟이라고 했습니까?”

유민 회장은 은근히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하긴 일을 크게 벌여놓고 자금에 시달리던 중이었으니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따놓았다는 말이 건성으로 들릴 리 만무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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