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7

“시청자들이 감동할 수 있는 스토리를 꾸미자고요? 인위적으로?”

“그렇습니다. 감동이 저절로 이루어지길 기다리다가는….”

유민 회장은 오른손을 칼처럼 펴서 뎅겅! 목 자르는 흉내를 냈다. 그러니 분위기가 어땠을까? 유민 회장은 실뱀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방송사 상무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방송사 상무 또한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기다리다가는?”

“상무님이나 저나 인생 쫑 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들어 보세요. 나는 이번 사업에 무려 3000억원을 투입했습니다. 소문으로 들어서 익히 아시겠지만 거의 강제로 털린 게지요. 내 아들 녀석마저 선수로 나서고요. 그런데 문제는… 내 아들을 포함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실력이 바닥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국민들은요, 잘 아시다시피 1등에만 연연해요. 축구경기도 그렇고, 피겨스케이팅도 그렇고, 김연아 선수가 없다거나 우리 축구팀이 예선탈락하면 아무리 큰 경기라도 외면한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 술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유민 회장은 맥주 컵에 42도짜리 독한 양주를 가득 따른 후에 얼음 하나를 달랑 채워 넣었다. 그가 컵을 흔들 때마다 딸랑이는 얼음소리는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가 혼을 부르는 방울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면 회장님은 망하고… 저는 임원에서 잘리게 된다는 말씀이군요.”

“정답입니다. 이번 랠리경기의 중계방송권을 신청한 것이 상무님 주장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경영자는 냉정합니다. 중계가 성공하면 상무님께선 전무로 승진되고 주머니도 두둑해질 겁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뎅강!”

“뎅강?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방송사에서 특별보너스라도 나온다고 하던가요?”

“그건… 제가 드리겠다는 겁니다.”

“네? 회장님께서 제게 돈을? 그것도 두둑하게?”

“쉿, 조용히 하세요. 남이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상무님께서 내 아들을 스타로 만들어주신다는 데 까짓 돈이 아깝겠습니까? 어차피 3000억원이 깨진 마당인데요. 3000억원이 어디 애들 이름인가요?”

“이거 참… 상당히 고무적인 말씀입니다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서….”

“이런 협상을 위해서 예고편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중요한 일일수록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온의 매듭을 단칼에 잘랐다고 하지 않던가요? 매듭만 풀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데, 그걸 일일이 손으로 풀고자 했던 놈들이 바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먼저 3억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들이 스타덤에 오르면 다시 3억을 드리지요. 도합 6억입니다. 그 안에는 시청자들이 감동할 만한 드라마 대본 비용도 담겨 있습니다. 비록 꼴찌를 하더라도 시청자들이 감동받아서 눈물을 질질 흘릴 수 있는 대본을 꾸며 주세요. 그 대본 그대로 연출하면 되지요, 뭐.”

방송사 상무는 잠시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민 회장은 바로 초인종을 눌러 잠시 전에 밖으로 나갔던 아가씨들을 다시 불러 들였다.

“이제 비밀회담은 다 끝내셨어요? 그럼 분위기도 띄울 겸 밴드 부를까요?”

마치 공식처럼 이어지는 술집 분위기 속에서도 방송사 상무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순, 무식을 지향하는 단무지, 유민 회장은 어느새 노래 가락을 뽑기 위해 목청을 고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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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