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할까? 이른바 부부 강간죄에서 ‘부부’와 ‘강간’은 얼핏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단어의 조합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는 성립한다.
대법원은 지난 16일 부인을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혐의(특수강간 등)로 기소된 A(45)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3년6월에 정보공개 7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실질적 부부관계로 볼 수 없을 때만 이른바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던 판례에 비하면 이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일보한 판결로 볼 수 있다.
핵심 쟁점은 강간죄 대상인 이른바 ‘부녀’에 법률상 아내가 포함되는지 여부였다. 부부 강간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은 사전적 의미에 중점을 뒀다. ‘강간’은 ‘강제적인 간음’을 뜻하고,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는 만큼 아내는 강간죄 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부녀란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불문하고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형법에 아내를 강간죄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내도 강간죄 대상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관들은 또 “부부 사이에도 폭행ㆍ협박이 동반된 성관계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했다. 이에 여성계는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정춘숙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남성에게는 권한으로, 여성에게는 의무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 때문에 가정폭력이 빈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이번 판결이 부부 갈등으로 이혼 직전에 있는 부부들에게 불필요한 고소 남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혼 소송을 염두에 두고 고의로 성관계를 기피해 범죄를 유발하거나 강간 혐의로 고소해 재산분할 소송 등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성폭력 범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친고죄ㆍ반의사불벌죄 조항도 폐지됐다. 국회는 지난해 11월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률안 5건을 모두 가결 처리했다. 피해자 등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 조항이 폐지돼 다음달 19일부터는 고소 없이도 수사와 재판이 가능하다. 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반의사불벌죄 조항도 폐지돼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된다.
이들 조항은 처벌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받아 왔다.
한편 부부 강간죄에서 논란을 일으킨 핵심 단어인 ‘부녀’에 대한 규정도 변경됐다. 개정에 따라 형법 및 특례법의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모두 ‘사람’으로 규정해 남성도 강간 및 간음 행위의 객체에 포함시켰다.
김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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