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 감추어진 승부 (24)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La Strada’ 우리나라에서는 ‘길’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유럽 영화, 극중에서 주인공 ‘잠파노’로 분장한 ‘안소니 퀸’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언제, 어디서라도 아스라이 떠오르는 불후의 명작이다.
그 영화에서 차력사이자 곡예사인 ‘잠파노’는 길 위에 차를 세워놓고 곧잘 트럼펫을 불곤 한다. 그 옆에 걸터앉은 여주인공 ‘젤소미나’는 멍청한 듯 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트럼펫 연주하는 걸 바라보곤 하는데… 그 어린 처녀, ‘젤소미나’의 표정연기야말로 세기에 남을만한 기막힌 장면이라고 한다.
약간 변태 적인 꼴만 무시하면, 곽승철 위원과 빨간 모자 에미나이의 표정이 꼭 그 영화장면과 같았다. 옷 벗고 누운 채로 알콜도수 60도가 넘는 위스키를 뒤집어썼으니 놀란 곽승철의 눈매가 여간 부리부리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곧 이어질 성화 봉송 장면을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멍청하면서도 사랑스러웠던 것인데… 딱 거기까지!
“위대한 수령 동지… 우왓! 뜨겁다우.”
곽승철은 온 몸을 타고 푸르게 번져나가는 불꽃을 보며 제 스스로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빨간 모자 에미나이가 걸터앉고, 그 밑에 찌그러진 방석처럼 눌려있던 곽승철이 호들갑을 떨며 몸을 일으키니 그녀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이고, 나 죽습네다.”
아무리 곡예사 출신이라고 해도 갑자기 굴러 떨어지는 데에야 별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들고 있던 위스키 병이 뒤집어지면서 콸콸콸! 알콜도수 60도에 이르는 위스키가 하필이면 지겟작대기 부위로 쏟아지고야 말았다.
“앗 뜨거, 앗 뜨거! 오지게 뜨겁다우!”
성화 봉송이란 이런 것일까? 온 몸을 살짝 훑고 지나간 푸른 불꽃은 사실 겉모양새만 장엄했을 뿐 뜨겁지는 않았다. 허풍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화주 마시는 시범을 보이듯, 잠깐 푸르게 빛나던 불꽃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야 마는 것이다. 문제는 지겟작대기 부위로 콸콸콸! 쏟아진 위스키였다.
“오마나, 내레 사고 쳤고만!”
지겟작대기 주위에 고불고불 불쏘시개가 붙어있었던가? 잠시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곽승철 위원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게 웬 사달인가. 빨간 모자 에미나이는 급한 김에 수건을 휘둘러 불을 끄기 시작했다. 불을 끈다는 것이 오히려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에미나이레 날 구워 먹으려고 하네?”
수염 타는 냄새가 방 안에 두루 퍼지고 나서야 눈을 뜬 곽승철 위원이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가 막혔다. 이 에미나이를 죽여? 살려.
“미안합네다, 위원 동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일부러 한 짓은 절대 아닙네다.”
빨간 모자 에미나이는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했다. 곽승철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와의 상열지사에는 가끔씩 이런 화해와 용서가 동반되는 것일까? 하긴, 곡예사 출신의 늘씬한 에미나이와 몸 친구를 하려면 이 정도 쯤은 감수해야지.
“일 없다. 어서 홍콩이나 가자우.”
곽승철은 안도의 한숨을 몇 차례 쉬고 나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제 스스로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더니 그 밑에 벌렁 드러누웠다.
“홍콩에 가자우, 내 말 안 들리네?”
“알갔습네다. 위원 동무.”
이미 뜨거운 불 맛을 보았지만, 그는 더욱 더 뜨거워지고 싶은 욕망에 빠져들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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