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개혁파 이미지 ‘우파진영 스타’ 부상
‘강한 프랑스’ 내세워 2007년 대선 승리
강경정책·막말·사치 논란 등에 재선 실패
대법, 2012년 재선시 선거자금 은폐조작 ‘유죄’
‘카다피 뒷돈’ 혐의 역대대통령 중 첫 수감 ‘굴욕’
판사매수 혐의까지…사실상 정치인생 종결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내가 감옥에서 자길 원한다면 감옥에서 잘 것이다.
하지만 고개는 높이 들 것이다.
[헤럴드경제=도현정 기자]정치 인생 내내 따라붙었던 부패·비위 혐의가 결국 복귀를 꿈꿨던 유럽 거물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달 26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재판 하나를 종결지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 열었다. 끝낸 재판은 2012년 재선에 도전하면서 영수증을 허위로 작성해 법정 한도인 2250만유로(약 383억5000만원)를 훌쩍 넘긴 4280만유로(약 729억5000만원)를 선거비용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다. 당시 사르코지의 홍보 대행사였던 비그말리옹의 명칭을 따 ‘비그말리옹 사건’이라 불리는 이 혐의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돼 집행유예 6개월을 포함한 징역 1년의 형이 확정됐다. 올해 70세인 사르코지의 나이를 감안하면 전자팔찌를 착용하고 가택연금하는 것으로 징역형을 갈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새로 연 재판은 리비아 자금 연루 사건이다. 프랑스 항소법원은 이날 내년 3월부터 6월까지 항소심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사르코지가 2007년 대선 출마 당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5000만유로(약 852억원)에 달하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는 지난 9월 25일 파리 형사법원 1심에서 징역 5년, 벌금 10만유로(약 1억7000만원)와 공직 담임 금지 및 피선거권 5년 박탈이 선고됐다.
이 판결은 형을 즉시 집행한다는 요건이 붙어 사르코지에게 실제 교도소행을 안겼다. 교도소에서도 그는 여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안전 보장을 위해 경호원 2명이 동행, 졸지에 경호원들도 사르코지 옆 방에서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다. 독살 등의 위협이 있다며 교도소에서 주는 음식은 거부하면서, 정작 요리를 할 줄 몰라 수감 기간 내내 요거트만 먹은 것도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교도소 생활은 딱 20일로 끝났다. 항소법원은 “증거 은닉이나 (증인) 압력, 공모 위험 등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조기석방했다. 사르코지에게는 3주도 채 되지 않은 수감 생활이 큰 충격이었던 듯 하다. 이달 초 교도소 생활에 대한 회고록을 낸다고 할 정도다.
사르코지는 위 두 건 외에 다른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도청 부패 사건’으로 지난해 12월 18일 징역 3년이 확정됐다. 이 징역 3년은 집행유예 2년을 포함, 실제 형은 1년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도 전자팔찌를 차고 가택연금하는 것으로 징역형을 대신했고, 이마저 고령을 이유로 3개월을 하고는 가석방됐다.
도청 부패 사건으로 사르코지는 2027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리비아 자금 연루 사건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확정판결이 난 날로부터 피선거권 박탈이 더 길어질 수 있다. 1심에서는 이미 5년의 피선거권 박탈 판결이 나온 바 있다. 나이와 피선거권 박탈 기간을 감안하면 재기는 물건너 간 상황이다.
프랑스 이주한 헝가리 귀족 가문 차남, 파리 위성도시에서 정치 첫 발
어디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기 시작했을까. 그의 시작은 헝가리 귀족 가문이다. 1628년에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서 작위 없는 귀족(소귀족) 신분을 받은 가문이 그의 부계다. 사르코지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프랑스로 건너와 외인부대에서 5년간 복무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획득했다. 차남으로 태어난 사르코지는 파리 낭테르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공화국 민주연합(현재 공화당의 전신) 입당과 변호사 자격 취득 등으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했다.
파리 근교의 위성도시인 뇌이쉬르센은 정치인 사르코지로서의 기반을 닦은 곳이었다. 명망있는 정치인 아퀼레 페레티가 뇌이쉬르센 시장이던 시절, 사르코지는 그의 조카 마리 도미니크 퀼리올리와 결혼하며 페레티와 인연을 맺었다. 36년간 뇌이쉬르센 시장을 했던 페레티가 1883년 임기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시 의회는 간접선거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부시장이었던 사르코지를 시장으로 뽑았다.
페레티는 그의 정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사르코지는 시장직을 이어받으면서 “6년 동안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페레티 시장을 만나면서 지방 정치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주요 현안에 대해 내 의견을 물었고, 지역 주민들은 내가 그의 제자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라며 페레티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여기에서 그는 미디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의 힘을 절감하게 된다. 뇌이쉬르센 시장 시절인 1993년 관내 한 유치원에 폭탄인질범이 난입,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사르코지가 직접 들어가 협상을 벌였다. 아이들을 내보내달라고 인질범을 설득하고, 몇몇 아이들을 직접 안고 나오는 장면이 방송되면서 그는 일약 스타가 됐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가 유치원으로 몰려드는 방송 카메라를 보고 인질 구출보다 자신을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협상에 뛰어들었고, 정작 협상에는 도움이 안됐다고도 전해졌다. 당시 인질범이 사살되면서 인질극이 끝났는데, 인질범이 아이들을 해치려 하지 않았는데도 사살해 버렸다는 정황증거가 나와 과잉진압이란 논란도 일었다.
그럼에도 정의롭고 용감한 젊은 시장 이미지는 그의 정치 인생을 탄탄대로로 다져줬다. 1993년 뇌이쉬르센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97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1999년 유럽의회 의원이 됐다.
정치 거물 시라크와 동반성장에서 견제 관계로...2007년 대선 낙승으로 정치인생 정점
2002년에는 시라크 정부의 내무 장관을, 2003년에는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강력한 치안 정책과 과감한 경제 개혁 등 ‘사르코지표’ 정책의 초안을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재선으로 대권을 쥔 노회한 시라크 대통령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조용한 행정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사르코지는 대규모 기자회견을 종종 열어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길 좋아했다. 늙은 대통령의 지향점에 반기를 드는 젊은 장관의 패기는 시라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언론에서도 종종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젊은 야심가와 어느 새 뒷방으로 물러나게 된 옛 거물의 대결 구도로 이를 조명했다. 당시 사르코지는 ‘매춘과의 전쟁’ 등 불도저 같이 밀어붙이는 강력한 정책으로 인기가 높았고, 우파의 차기 대권주자로 이름을 높이던 때였다. 시라크의 ‘3선 도전설’이 나오자 사르코지는 “프랑스도 미국처럼 재임까지만 가능하도록 제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만큼 시라크와 각을 세웠다. 시라크는 향후 회고록에서 “그(사르코지)를 불복종으로 내각 장관직에서 해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파괴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회고록에서 시라크는 사르코지를 “짜증스럽고, 성급하고, 과신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고, 특히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시라크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사르코지는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셰골렌 루아얄 후보를 꺾고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의 클라이막스를 열었다. 사르코지는 임기 내내 작은 정부, 시장 친화, 노동 유연화 정책을 지향하면서 ‘개혁 대통령(하이퍼 프레지당)’을 자처했다.
그의 대선 캐치프레이즈도 ‘강한 프랑스’였다. 마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과 비슷하다.
그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자(travailler plus pour gagner plus)’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복지를 과감히 축소하기 시작했다. 주 35시간을 넘어서는 초과근로에는 세금·사회보험을 면제하도록 했고,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 폭넓게 매겼던 세금은 축소했다. 공무원은 2명 퇴직하면 1명만 신규로 채용하는 ‘1/2 대체원칙’을 시행하면서 감축했고, 법정 정년은 60세에서 62세로 상향시키면서 연금개혁을 추진했다.
일이 없으면 사람들이 가난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정말 열심히 일한 사람이 가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와서 베일을 쓰고 행정 건물에 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아내가 남자 의사에게 진찰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프랑스는 열린 나라다.
강경책은 거센 반발도 불러왔다. 사르코지의 임기 중에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잦았는데, 특히 정년을 연장해 연금 납부 기간을 늘린 연금개혁이 큰 반발을 불러왔다. 막말과 무례 외교 논란도 꾸준했다. 내무장관이었던 2005년에는 파리 교외 소요사태에 가담한 교외(게토) 청년들을 “쓰레기”라며 “진공청소기로 청소해버리겠다”는 과격 발언을 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불렀다. 2008년에는 농업박람회장에서 그의 악수를 “더럽다”며 거부하는 시민에게 “그럼 꺼져, 불쌍한 머저리야!”라고 맞받아쳤다. 현직 대통령이 국민과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장면은 당시 여러 방송사에서 중계됐다.
시라크 전 대통령과 한창 사이가 안 좋던 시절에는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겨냥해, 일본 스모를 “머리에 기름칠을 잔뜩한 뚱뚱한 놈들끼리 싸우는데 누가 매혹될 수 있겠냐”며 비하 발언을 했다. 2009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초대하지 않아 결례 논란이 일었다. 노르망디가 프랑스 영토지만, 연합군에서 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행사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연 배우 톰 행크스까지 초대한 상황. 배우까지 초대하면서 영국 여왕을 빼놨다는 것을 두고 영국에서는 국민적 분노가 일었다. 뒤늦게 영국 여왕을 초대했지만, 행사에는 찰스 왕세자(현 영국 국왕)가 대신 갔다. 영국 여왕이 분노해 아들을 대신 보냈다는게 외교가의 ‘정설’이었다.
막말, 反 이민정책 등 ‘트럼프의 원조’...재선 실패 후 험로 열려
프랑스에서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 신경을 썼지만, 정작 이들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반(反) 이민정책에 앞장섰다는 점에서도 트럼프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이민·통합·국가정체성·공동발전부’를 만들어 이민 규제를 강화하고, 불법체류자 추방 숫자를 목표치로 관리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프랑스 내 공공장소에서 전신을 가리는 이슬람 복장(부르카나 니캅)을 착용할 수 없다는 법을 내놔 이슬람 혐오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받았다.
사르코지 임기 중 프랑스가 유럽연합(EU) 의장국이어서 2008년 금융위기나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이른바 PIIGS)의 유로존 재정위기에서 대책을 강구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자주 붙어다녀서 ‘메르코지’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자신이 유럽 권력의 정점에 서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된 것일까. 프랑스 내에서 자신에 대한 불호(不好)가 크다는 점을 간과했던 듯 하다. 2012년 대통령 재선에 도전한 그는 시라크 전 대통령까지 상대 후보인 올랑드를 지지하면서 고립무원 신세가 됐다.
결국 그는 재선에 실패하고 단임 대통령으로 끝났다. 프랑스 정치사 중 단임 대통령은 퐁피두, 지스카르데스텡, 사르코지, 올랑드 등 넷 뿐이다. 이 중 퐁피두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사망했고, 올랑드는 스스로 재선을 포기했다. 재선에 도전했다 실패한 대통령은 지스카르데스텡과 사르코지 둘 뿐이다.
사르코지는 집념의 권력자였다. 끊임없이 재기를 시도했는데, 2014년 11월 대중운동연합 대표로 취임하고, 이미지 쇄신 위해 당 이름을 공화당으로 바꾸면서 본격 재임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016년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대통령 시절 총리였던 프랑수아 피용과 보르도 시장인 알랭 쥐페에게 밀려 3위에 그치면서 주저앉았다. 전직 대통령이 2위도 아닌, 3위에 그쳤다는 데에서 재기의 동력을 크게 잃었다.
이후 정치인생은 험로의 연속이었다. 그는 재기를 시도했던 2014년에도 사법리스크를 안은 상태였다. 2012년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마자 프랑스 최대의 화장품 기업 로레알의 상속녀이자 프랑스 대부호 중 하나인 릴리안 베탕쿠르로부터 15만유로(약 2억5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재선 실패 직후 수사 통보가 나온 것으로 봐서 검찰이 진작 혐의를 잡았지만 대통령은 외환이나 내란 외에는 사법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령에 치매였던 베탕쿠르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점에서 사르코지의 혐의에는 취약한 노인을 이용했다는 점이 명시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13년 10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 됐는데, 여기에서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베탕쿠르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다 생각한 2014년 사르코지가 내부 수사 정보를 제공해달라며 판사를 매수하려 한 혐의가 나온 것이다. 검찰은 사르코지가 2014년 질베르 아지베르 당시 대법관에게 수사와 관련한 내부 기밀을 알려주면 모나코에서 퇴임 후 법관으로 일하게 해주겠다고 회유하는 통화 내용을 확보했다.
황당한 것은 검찰이 이 통화를 확보하게 된 경위다. 당시 검찰은 2007년 대선때 사르코지가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불법 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포착,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사르코지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다 판사 매수 시도를 포착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도청 부패 사건’이라 불린다.
정작 베탕쿠르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났다. 사르코지는 기소도 안된 사건에 괜히 판사 매수를 시도했다 끝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작은 키, 사치, 사생활...숱한 추문 남긴 정치 풍운아
사르코지는 최초, 내지는 두번째 등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인물이다. 현대사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제5공화국 이후만 놓고 보자면 범죄 혐의로 기소된 것으로는 시라크 전 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다. 교도소에 간 대통령으로는 최초다.
대통령 임기 중 이혼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뇌이쉬르센 시장이던 시절 유부녀였던 세실리아 시가네르-알베니스와 불륜에 빠져, 마리와 이혼하고 세실리아와 재혼했다. 공인의 사생활에 관대한 프랑스도 여기에는 논란이 많았는데 세실리아와 마리가 친구였고, 세실리아가 전 남편과 결혼할 때 사르코지가 주례를 섰기 때문이다. 사르코지는 자신이 주례를 해준 부부를 갈라서게 한 셈이었다.
이렇게 만난 사르코지와 세실리아는 대선 전부터 관계가 삐걱이다가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그 전부터 사르코지와 세실리아가 맞바람을 피웠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세실리아는 사르코지와 이혼하자마자 모나코 사업가와 재혼했고, 사르코지도 이혼 100여일만에 이탈리아의 모델 겸 가수 카를라 브루니와 결혼했다. 브루니는 이후 딸을 출산, 사르코지는 재임 중 자녀를 본 첫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사르코지와 브루니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성향이 특히 그렇다. 사르코지는 롤렉스 등 고급 시계를 비롯해 사치품을 좋아해 언론에서 ‘블링블링 대통령(le président bling-bling)’이란 말로 이를 비꼬기도 했다. 개인의 성향 자체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개인 자산이 아닌 정부 지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영국 선데이타임즈는 사르코지 임기 중 프랑스 사회당 도지에르 의원이 폭로한 바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에 주차된 사르코지의 차는 무려 121대였다. 사르코지는 매년 보험료만 10만파운드(약 1억9000만원), 연료비로 27만5000파운드(약 5억3000만원)를 썼다고 전해진다.
브루니 역시 사르코지에게 3만4000달러(약 5000만원)의 디올 반지로 프로포즈를 받을 만큼,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이는 드골, 미테랑 등 검소한 생활을 했던 대통령을 존경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겼다. 특히 미국 발(發) 금융위기와 유로존 재정 위기로 국민들이 한창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라 더욱 그랬다. 경제가 어려울 때 대통령은 경제 개혁이라며 복지를 대폭 축소해놓고, 정작 본인들은 세금으로 사치를 부린다는게 논란의 골자였다.
둘은 서로 이성 관계가 복잡했던 것까지 닮았다. 사르코지는 세 번의 결혼 생활 내내 배우자 외 많은 여성들과 어울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 모델이었던 브루니도 롤링스톤즈의 보컬 믹 재거를 비롯해 에릭 클랩튼, 프랑스 전 총리 로랑 파비우스, 심지어 프랑스의 부자(父子) 철학자인 장폴 앙토방과 라파엘 앙토방까지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사르코지 임기 중에도 ‘맞바람설’이 돌았다. 브루니가 가수 벵자멩 비올레와 불륜에 빠진 사이, 사르코지는 샹탈 주아노 생태담당 장관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불화설이 나오지만 둘은 현재까지 부부의 연을 잘 이어오고 있다. 이 둘을 두고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펜트는 “그들은 사냥꾼과 포식자, 즉 서로를 위해 만난 존재” 라며 “그(사르코지)는 많은 여성들을 유혹했고, 그녀(브루니)는 일종의 유혹녀였다.”고 일컫기도 했다.
사르코지는 재임 시절 아들들로 인해 구설수에도 자주 올랐다. 첫째 부인 마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피에르는 우크라이나에 DJ로 공연을 갔다가 식중독에 걸리자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 프랑스 공군 소속 팰컨50을 특별기 형식으로 이용해 귀국한 바 있다. 당시 정부 자원을 대통령 일가가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이후에도 해외 공연을 갈 때마다 과잉 경호로 논란을 빚었다.
차남인 장은 교통사고 뺑소니 혐의로 구설수에 올랐다. 사르코지가 내무장관이던 시절인 2005년 장이 스쿠터로 BMW 자동차 뒷범퍼를 들이받고는 손가락 욕을 하고 도망갔다는 혐의다. 이는 차주가 스쿠터 번호를 신고했음에도 1년여간 수사에 진척이 없다가 2008년에야 기소를 했다는 데에서 고위층 인사에 대한 전형적인 봐주기라는 비판이 일었다.
둘째 부인 세실리아가 낳은 3남 루이는 엘리제 궁에서 친구와 놀다 근처를 경비하던 여성 경찰관 얼굴에 토마토와 구슬을 투척, 여경이 이를 고발했다가 사르코지가 대신 사과해 사건 접수를 취하하는 일도 있었다. 사르코지의 사과도 재선을 앞두고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란 비판이 많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온갖 타격이 가해질 수 있고,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럽 이민자 폭증 계기 만든 ‘아이러니’…親러·反우크라, 현 정부와 반대노선도 눈길
사르코지는 임기 내내 반(反) 이민자를 정책을 폈지만, 정작 유럽 내 이민자들이 대거 쏟아지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2011년 리비아에서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자, 그는 프랑스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개입을 주도했다. 당시 시민 봉기에 위협을 느낀 카다피 정권은 대량살상무기 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서방 세계에 정권 안전 보장을 요청했다. 국제사회가 보기에도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고 나면 이슬람 극단주의자 등 위협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이 명백했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프랑스군을 동원해 리비아를 폭격하고, NATO군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결국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 결과 우려대로 테러리스트 단체인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국민합의정부가 리비아를 장악했고, 이들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을 헌법의 기반에 두겠다며 공포정치를 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세속주의 세력이 이에 반발해 내란이 이어지면서, 이를 피하려는 수많은 난민들이 유럽으로 쏟아졌다.
당시 사르코지가 프랑스 및 NATO군 투입을 주장했던 명분은 리비아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리비아 자금 연루 사건이 불거지면서, 자신이 정치자금을 받았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군을 동원해 카다피를 제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명분도, 실리도 잃고 자신에 대한 최대 사법 위기까지 불러온 최악의 수(手)가 됐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사르코지가 현재 정권을 잡았다면 러·우전쟁도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듯 하다. 사르코지는 2008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거부했고, 러시아 군사력 강화에 기여하는 등 선명한 친러 성향을 보여줬다. 프랑스의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을 러시아에 수출하는 과정에서 통신 센서 등 핵심 기술이 러시아로 이전될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를 밀어붙였다.
사르코지는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과 EU 가입에 반대하고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의 영유권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현 프랑스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찬탈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보다. 유럽 국가들 역시 러시아 입장에 기운 러우전쟁 종전안을 적극 막아서며,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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