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에서부터 스페인 북서쪽의 작은 마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유명하다. 그 길이만 무려 800킬로미터 남짓 무려 2천리에 달하는데, 순례자들은 눈길이든 진흙탕 길이든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걸어만 간다.
현실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인지, 혹은 새로운 목표와 의미를 설정하고 그걸 다져나가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운명처럼 걷는 일을 반복할 뿐. 20일, 한 달, 40일… 낯선 길을 홀로 걷다가 발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헤질 지경이 되어서야 그들은 서서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떠나왔는지, 혹은 무엇을 찾아 떠나왔는지를.
그런 의미에 빗대어본다면 현성애는 2천리 길을 끝없이 걷고 있는 순례자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스물다섯 살 때부터 유민 회장만을 바라보며 비서로서 묵묵히 일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랑 병을 앓기도 했었다. 무려 30 여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그녀는 유민 회장과 상열지사에 이르기도 했었는데… 목포 근처, 삼학도 갓바위에 차를 세워놓고 밤새도록 미어캣 놀이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웠다.
승용차 지붕에 부착된 선루프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망을 보던 일이 결코 남에게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비좁은 승용차 안에서 유민 회장과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공연히 가슴이 뛰고 마음이 달아올라서… 그의 눈길이라도 피하고자 했던 고육지책이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그날, 삼학도 갓바위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속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네가 늘그막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구나!”
유민 회장은 좁은 승용차 안에서 바지를 내려 돌돌 무릎에 감아 걸고, 와이셔츠를 어깨까지 말아 올리며 이렇게 말했었지. 그동안 그녀는 사이드브레이크를 단단히 채우고 구두를 벗은 채 맨발로 시트에 올라섰을 것이다. 그리고는 지붕에 뚫린 선루프의 사각 구멍으로 상체를 내밀었지.
두 발로 쫑긋 서서 상체를 자동차 밖으로 내밀고 망을 보는 청순한 그녀. 그러나 자동차에 가려진 허리 아래로는 뜨거운 폭풍이 몰아치지 않았던가.
“회장님, 랠리사업이 성공해서… 국회의원이 되시면… 저도 좋은 자리 하나쯤 챙겨주실 거죠?”
함께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곧 성공할 것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마음도 몸을 따라 뜨거워지는 모양이었다. 자동차 지붕을 벅벅 긁어대던 현성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엑스자로 모아 셔츠 아랫단을 잡더니 훌렁 위로 벗어던졌지… 그런데,
“너무 오버하지 마. 사랑을 핑계로 청탁을 일삼지 말라고.”
유민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나체가 된 그녀의 몸을 덥석 끌어안을 뿐이었다. 테이프를 뒤로 돌려 과거를 새롭게 분석해 보니, 삼학도 갓바위 아래의 어두운 그늘에 세워놓은 자동차 안에서 나눈 사랑을… 유민 회장은 ‘누워서 땅콩 집어먹기’ 정도로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현성애는 연령과 지위를 초월하여 나눈 그 사랑을 성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스페인 북서쪽 산티아고를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순례자… 사랑을 얻기 위한 순례자의 심정으로 그를 받아들인 셈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현성애와 유민 회장의 관계에 불꽃이 다시 이는 것인지… 조바심을 치며 공항으로 나선 유민 회장의 눈앞에 문득 현성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지만 결국엔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서처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순례자들처럼 그들이 공항에서 마주친 것이다. “회장님, 여기 비행기 표 구해왔습니다.”
“아니? 자네… 현 양 아닌가?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일부러 찾아왔지요, 회장님. 반가워요. 몬테카를로 랠리 끝나고 처음 뵙네요.”
불쑥 비행기 표를 내미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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