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45
“아이고, 유리 씨! 어떻게 좀 해봐요.”
“어쩌자고 버튼을 눌렀어요? 비행기에서는 압축공기로 물을 내려보낸다는 것도 몰라요? 진공이 된 상태에서 엉덩이가 변기보다 크기 때문에… 짝 달라붙었어요.”
“글쎄 이론으로 설명하려 들지 말고… 날 좀 일으켜 달라고요.”
“내 힘으론 안 된다니까요? 왜… 그거 있잖아요? 그것과 동일한 원리로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게 뭔데요?”
“뻥 뚫어! 긴 막대기에 시꺼먼 고무 고깔 달아놓은 거 있잖아요. 왜… 변기 막혔을 때 뚫는 거요.”
“아, 정말 미치겠네.”
권도일이 거성자동차그룹의 운명을 쥐고 고심하며 북한 땅을 밟던 그 순간, 유호성은 비행기 화장실 변기에 엉덩이가 낀 채 고민하던 중이었다. 극에서 극은 서로 통하는 법인가? 권도일은 땅에 있고 유호성은 하늘에 있었지만 그 비장함은 서로 다를 바 없었다는 말이다. 비록 가치와 명분은 달랐을지언정.
“나야말로 미치겠어요.”
강유리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하긴 불길이 닿기만 하면 곧 폭발할 것처럼 몸을 달아오르게 해놓고는 저 홀로 변기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니 이걸 어쩌나.
“힘껏 잡아당겨 봐요.”
“내 힘으론 안 된다니까요?”
“그럼 어쩌라고!”
“승무원을 불러야지, 뭘 어째요?”
“승무원을 부르면… 여태까지 살려놓은 무드가 왕창 깨지잖아요?”
“지금 무드 잡게 생겼어요? 그 상태로 계속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피 맺힌 것처럼 뻘겋게 될지도 몰라요.”
“진짜 되는 일이 없네.”
“내 말이….”
하지만 어쩌랴? 손자병법에서도 이르기를 더 이상 재간이 없을 때엔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라 하지 않았나.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도망이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 수 없어요. 남들에게 들키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을 빠져나갈게요. 그다음에 오빠는 저 비상벨을 누르시면 돼요.”
“스튜어디스가 들어오면 어쩌라고!”
“그 아가씨들이 설마 무작정 들이닥치겠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부터 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이렇게 얼버무리더니 옷매무새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블라우스 단추를 잠그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는 요조숙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녀의 변신을 바라보는 유호성은 그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날 이렇게 두고 가면 어떡해? 제발 살려주라, 응?”
혼자서는 발목에 걸린 바지도 추켜올릴 수 없었으므로 그는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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