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바람 부는 길(2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권도일이 베들레헴에 있는 산타마리아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0시 30분, 예정보다 무려 1시간이나 연착한 셈이었다. 그를 제외한 38명의 순례단원들은 너무도 고단한 탓에 반쯤 눈을 감은 모습으로 각자의 호텔방을 배정 받았다. 하지만 권도일은 심한 멀미로 반쯤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계획대로 꾀병을 부리는 중이었다.
꾀병을 부리기에도 철저한 기획이 필요했다. 멀미를 심하게 한 뒤끝으로 보이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열 시간 남짓 이런 궁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단 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순례단원에게 보여도 좋고 가이드에게 보여도 좋았다. 어쨌든 목적은 현지에 도착해서 병원으로 빠져나갈 빌미를 얻어내면 그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기내 화장실에 들어가 실을 삼키고 억지로 토를 해내었다. 이왕이면 지저분하게… 몸을 추스르기도 귀찮을 만큼 아픈 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토사물의 일부를 옷깃에 묻히기도 하고 구두코에 슬쩍 바르기도 했다.
“아무래도 병원엘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토했으니 당장 병원부터 가보셔야지요. 마침 순례단원을 태우고 온 저 버스가 병원 쪽을 향해 되돌아간다는 군요. 저 버스를 이용하세요. 제가 병원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이 야밤에 병원이 문을 열었을까요?”
“응급실로 가셔야 할 겁니다. 자 따라 오세요.”
권도일은 순순히 가이드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재벌 2세가 전해준 아이패드에 따르면 병원은 베들레헴 언덕 중앙에 있다고 했다. 베들레헴 언덕까지는 8킬로미터, 지금처럼 도로가 텅 빈 상태에서는 10분 이내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어떤 방법을 쓰든 입원을 하고 가이드를 되돌려 보내라고 적혀있었다. 마치 적국을 넘나들며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공작원이 된 느낌이었다.
응급실 의사들이 임무를 교대하는 새벽 6시에 이스라엘 ‘어번’ 사의 직원이 그를 퇴원시켜 줄 것이라고 아이패드에 적혀 있었다. 그러니 새벽 6시 까지는 머나먼 이국에서 혼자 병실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물론 그 이후에 순례단원들과 가이드를 따돌리는 일은 이스라엘 어번 사 직원의 임무였다. 이제 곧 응급실에 입원하게 되면 간호사들이 채혈부터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참아야 할 것이다.
“새벽까지 신세를 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권도일은 가이드 앞에서 다시 한 번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울 때가 제일 기쁘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이던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씀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권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 2세가 3M 메모지에 적어 준 사이트 주소를 찾아 성경공부를 한 지도 벌써 닷새가 되었건만 아직까지 어떤 성경 구절이 어느 복음서에 담겨있는지는 알 재간이 없었다.
“그렇지요.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씀입니다.”
“푹 쉬시고 밤새 완쾌되셔야 합니다. 내일 순례할 곳이 ‘예수탄생 성당’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지금 다른 벽은 다 막혀있습니다. 제일 낮고 좁은 문만 남아있지요. 내일은 바로 그 좁은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겸손의 덕목을 깨우칠 예정입니다.”
아무러면 어떠랴. 권도일은 조근조근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비밀스러운 일에 휘말려 머나먼 이스라엘에 까지 오게 된 것을 어쩌면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유민 회장 때문이야. 죽일 놈.’
그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조용히 상념에 젖어들었다. 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집안을 망친 유민 회장이 아니었다면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는 떠올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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