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회> 끝까지, 죽을 때까지 54

랠리 결과는 뜻밖이었다. 개막전에서는 푸조 듀오가 초반 상승세를 치고나갔지만 중반에서부터 맹추격을 감행한 미코 히르보넨이 현격한 차이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고야 말았다. 히르보넨은 2위 스코다와의 차이를 무려 40초나 벌려 놓았던 것이다. 포드의 뉴 피에스타 S2000으로 데뷔와 동시에 우승을 차지한 미코 히르보넨이 부각되면서 작년 우승자였던 세바스찬 오기에르가 저무는 해처럼 가라앉는 모습은 그야말로 각본을 마련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누가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고 노래했던가. 몬테카를로 랠리가 장엄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 또 다른 두 대의 라이벌 차량을 바라보는 주인공들의 시각은 그야말로 요지경 속과 같았다. 물론 두 대의 출전차량이란 권도일이 모는 1974년산 치타와 유호성이 이끌던 재규어 XKR이었고 그걸 바라보는 주인공들이란 신희영을 비롯하여 권일주, 재벌2세, 유민 회장, 권도일, 유한솜, 유호성 등등 이었다.

포드의 뉴 피에스타 S2000이 결승선을 밟은 지 30분쯤이나 지났을까? 어쩌면 1시간이 훨씬 지난 후인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긴장을 감추지 못한 상황에서 축제 마당처럼 흥겹게 들뜬 채 맞이했던 골인의 순간! 그러나 긴장과 흥분이 썰물처럼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재규어 XKR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재규어 XKR이 어떤 머신인가? 4,200cc의 배기량에 420마력의 힘을 지닌 슈퍼차저 엔진, 청춘의 피를 끓이기에 충분한 디자인, 상어 지느러미 형태의 보닛 방출구를 통해 나오는 굉음, 햇빛에 번득이는 알루미늄 차체로부터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날렵함과 강인한 이미지, 맹견의 입을 연상케 하는 그물망 그릴로부터 크롬 빛으로 날카롭게 번쩍이는 듀얼 머플러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머신이었다. 그런 머신으로 꼴찌를 하다니!

“어이 쪽 팔려! 이게 모두 다 진후 형이 영화촬영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라고요. 1분 1초가 아까운 판에 영화촬영이나 하다니 꼴찌가 당연하지요.”

“이 양반아! 왜 내 핑계를 대고 그래? 운전은 당신이 했지 내가 했어? 막말로 내가 영화촬영을 하든 생 쑈를 하든 당신이 운전만 잘 했으면 꼴찌 신세는 면했을 거 아닌가? 진짜 쪽 팔리는구먼.”

서로가 누워서 침 뱉기였다. 하지만 생산 된 지 30년이 넘은 상태에서, 그것도 온통 불에 타 그을은 모습으로 출전한 거성의 1974년 산 치타는 당당 3위로 결승선을 밟았으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김지선 씨, 최선을 다해줘서 고마워요.”

“역시 권도일씨는 근성을 지닌 드라이버예요. 이 영광을 튜닝의 지존 현성애 씨에게도 나눠 주고 싶어요.”

우승자와 49초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니 서로 감격에 겨울 만도 했다. 고스톱이 유행한 이후로 이런 경우를 ‘자뻑’이라고도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감격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1974년산 치타가 당당히 3등으로 들어서고 재규어 XKR이 보란 듯이 꼴찌로 들어서는 순간, 주인공들의 반응은 천차만별! 말 그대로 요지경 속이었다.

‘도일아! 죽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했구나!’ 이것은 휠체어에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던 권일주의 복잡한 심정이었고… ‘저 병신 같은 놈이 진짜로 꼴찌를 했네!’ 이건 호텔 침대에 엎드려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던 신희영의 단순한 심정이었다.

‘권 전무! 좋았습니다. 역시 근성이 있군요.’ 이것은 어렵게 소식을 전해들은 재벌 2세의 감탄이었고… ‘염병! 돈이 아깝다, 이 한심한 놈아!’ 이건 꼴찌 했다는 소식에 술에 취해서도 내지른 유민 회장의 일갈이었다.

그 뿐인가? 유한솜은 당당히 살아서, 그것도 3등으로 결승선을 밟는 권도일의 모습에 그만 울컥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고, 강유리와 백광돌은 누가 3등을 하든 말든, 누가 꼴찌를 하든 말든 서로 입술을 꿀떡처럼 붙이고 입 맞추기에 정신이 빠져 있을 따름이었다.

제풀에 맥이 빠진 사람은 1974년 산 치타의 튜닝을 담당했던 현성애였다. 그녀는 유호성이 모는 재규어 XKR의 정비를 담당하는 미캐닉이었음에도 아무런 사고 없이 유호성이 결승선을 밟았다는 점을 원통해 하고 있었다. 명색이 미캐닉으로서 차체 결함으로 드라이버가 다치거나 죽는 상황을 초래하기는 싫었다. 그녀가 바라던 바는… 머신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과속으로 달리다가 제풀에 뒤집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호성은 꼴찌를 했을망정 뻔뻔하게 결승선을 밟았으니… 10년 바램이 도루아미타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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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