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끝까지, 죽을 때까지(1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생떼 같은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은 아비의 심정은 어떨까?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자객으로 보낸 아비의 심정은 어떠할까?
권일주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휠체어에 올라앉은 신세만 아니어도 본인 스스로 원수를 찾아 나섰겠지만 반신불수가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운명이란 어찌 이리도 기구한가? 아니, 운명을 탓할 일만은 아니었다. 가슴 한 구석에 영원히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불꽃… 원한 맺힌 마음을 기름삼아 끊임없이 타오르는 분노를 탓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렇다면, 철천지원수의 피를 물려받은 여식이 본인의 생떼 같은 아들을 사랑한다며 무릎 꿇고 눈물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또한 어떠할까? 한 술 더 떠서 그녀가 사랑한다는 아들이 이미 목숨 줄을 놓아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유한솜 양이라고 했나요? 쓸 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당장 전화 끊어요.”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아버님. 제발 제 뜻을 받아주세요.”
“글쎄, 전화 끊으시라니까? 지금 한솜 양이 느끼는 감정은 절대 사랑이 아니라오. 그건 우릴 얕보고 동정하는 거예요. 나는 원수 집안의 딸로부터 싸구려 동정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버님.”
“난 아가씨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당장 전화 끊으세요. 아니면 내가 먼저 끊겠소.”
유한솜으로부터 황당한 내용의 전화가 걸려온 때는 프랑스 남부지역방송의 정오 뉴스가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물론 불어로 방영되는 뉴스였으므로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화면에 비쳐지는 그림 만으로라도 몬테카를로 랠리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 권일주는 TV를 마주하고 있던 중이었다.
권일주가 묵고 있는 호텔로 먼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유한솜이었다. 권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수 집안의 외동딸인 셈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전화를 통해 한다는 말이 뭐? 아드님 권도일씨를 사랑한다고? 권일주로서는 심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 애비에 그 딸이라더니 남의 가슴에 염장 지르는 꼴은 부녀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아버님, 제발 끊지 마시고 제 말씀 좀 들어 주세요.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답니다. 며칠 전, 아버님 초대로 그 호텔에 찾아갔을 때부터…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어째서 우리 집안과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이후부터 저는 사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더 이상 듣기 싫어요. 끊읍시다.”
“…그래서 저는 남은 생애를 사죄하는 의미로 아버님의 병수발을 들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이에요. 아버님께선 하반신을…”
“시끄러워! 듣다보니 어린 계집애가 별 소리를 다 하는구먼.”
권일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해 전화기를 집어던지고야 말았다. TV 화면을 통해 자동차의 모습이 보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던 순간에 쓸데없는 전화까지 걸려와 더욱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유한솜이라고? 그의 기억에 유한솜은 아직 귀밑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그런 철부지가 아들 도일이를 사랑한다는 말이 당돌하게도 여겨졌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유민 회장을 대신하여 사죄하는 의미로 자신의 병수발을 들겠다고 나선 점이었다. 반신불수에 대소변마저 가릴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을 평생 수발하겠다고? 그것도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처녀아이가?
“엣 퉤! 이 더러운 것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침을 뱉었다. 침은 휠체어를 벗어나 바닥에 곱게 깔린 카페트 위에 들러붙었다. 원수 집안의 어린 딸마저 자길 농락한다는 생각에 이곳이 고급 호텔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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