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원자력 기술의 본산인 미국에 연구용 원자로 설계 기술을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원자력연구원, 현대엔지니어링, 미국 MPR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미국 미주리대가 발주한 ‘차세대 연구용 원자로’ 사업 초기설계 계약을 따냈다. 1959년 미국으로부터 첫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를 도입한 지 66년 만에 원자력 원조국이었던 미국에 설계 기술을 역수출한 기념비적 성과다.
이번 사업은 열출력 20㎿(메가와트)급 고성능 연구로를 건설하기 위한 초기설계 단계로, 부지 조건과 환경영향평가 등 사전 설계 분석이 핵심이다. 원자력연 컨소시엄은 이 사업에 참여해 지난해 7월 최종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사업 첫 단계인 초기설계 계약을 17일 확정했다. 기술의 첫 신뢰를 가르는 관문에서 한국 컨소시엄이 선택받았다는 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로 분야 기술력이 세계에서 통했다는 증거다.
연구로는 의약용 동위원소 생산, 첨단 소재 실험, 중성자 과학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로 그 중요성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고성능 연구로 수주는 단순 기술 계약을 넘어 한국이 글로벌 기술 강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도 원자력 기술 통제를 가장 엄격히 하는 미국이 계약 상대라는 점에서 상징성은 더욱 크다. 최근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분류하면서 우려가 제기됐지만, 이번 계약으로 그런 우려도 불식됐다.
이로써 한국은 요르단, 네덜란드, 방글라데시 등 6건의 연구로 기술 수출을 이룬 데 이어 총 7건의 실적을 기록하게 됐다. 향후 성장 가능성도 좋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등록된 연구용 원자로는 총 847개로 이 중 54개국에서 227개 연구로가 운영 중이다. 40년 이상 된 노후 연구로들이 많아 교체·고도화 수요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특히 의약, 소재, 중성자 과학 등 응용 분야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시장도 커지고 있어 한국의 진출 여지가 크다. 틈새시장이지만 효자노릇을 할 수 있다.
이 흐름을 이어 기술고도화와 산업 생태계 육성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특히 한국이 자체 개발한 고밀도 핵연료 기술은 핵확산을 억제하면서도 고성능을 구현한 선진 기술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을 쓰지 않고도 성능을 확보할 수 있어 기술력과 비확산 규범을 동시에 충족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연구로와 함께 소형모듈원자로(SMR) 수출 전략을 추진하고, 2029년까지 320억원을 투입해 고성능 다목적 연구로 기본모델을 개발키로 한 것은 기술 강국으로의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다. 전 세계가 다시 현실적인 에너지 해법으로 원전을 주목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다.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