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정치판에 직장상사에 자식교육 때문에 한잔 또 한잔… 약이 되고 때론 독이 되는 ‘천의 얼굴’ 술…당신은 지금 몇차?

일제 강점기 소설가 현진건은 ‘술 권하는 사회’(1921년)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여기서 일본 동경 유학을 다녀온 주인공은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데, 그 이유를 묻는 부인에게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오.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는 말을 남긴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술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 찢겨진 나라가 술잔을 채우게 하고,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는 직장이 또 한 잔을 채운다. 무능한 직장상사 때문에 한 잔, 아이 성적이 오르지 않아 한 잔, 부모님 건강이 걱정돼 한 잔. 저녁 뉴스가 시작되면 여러 잔을 들이켠다. 대통령 후보자 얼굴 보면서 한 잔, 흉칙한 사건 사고 접하면서 한 잔, 아파트 가격 떨어져 또 한 잔. 딱 한 잔만 하자고 시작한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진다.

비워진 술병이 테이블 위를 뒹굴 때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로 말머리가 모아진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생활은 나아지지 않아.’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아. 돌파구가 없어.’ 다음 날 기억날지 어떨지 모르는 취중진담이 쏟아진다.

이런 모습은 오늘 저녁 어느 선술집에서든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다. 성인 1인당 연간 소주 소비량이 98병에 이르고 맥주는 119병에 달한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술 권하는 사회’임은 분명해 보인다.

술자리를 접고 어렵게 잡아탄 택시에선 송년회 시즌답게 술을 주제로 한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70년대 ‘노틀카(술잔을 놓지도 말고 트림도 하지 말고 마신 후 카~ 하는 소리도 내지 말 것)’ 바람을 일으켰던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에서부터 최근 병원 금지곡으로 선정된 바이브의 ‘술이야’까지.

바야흐로 술과 ‘절친’이 될 수밖에 없는 연말연시다. 경기 불황으로 송년 모임도 다양하게 변하고 있지만, 길거리에 취객들은 여전하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술의 3분의 1이 소비된다고 하니, 불경기도 ‘술독에 빠진 대한민국’을 건져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올해엔 대통령선거와 같은 정치 이슈가 겹치면서 술자리는 더욱 길어지는 느낌이다.

통계상 대한민국 직장인 남성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술을 마신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이 연간 마시는 알코올 양은 14.8ℓ(2005년 기준)에 이른다. 세계 13위 수준이다. 위스키, 소주와 같은 증류주 기준으로는 연간 소비량이 9.57ℓ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로 술을 마시는 사회에서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음주운전 등도 문제지만 알코올 중독이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알코올 중독자가 300만명을 넘고 알코올 남용자는 4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술을 즐겨 마시는 데에는 사회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선호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술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차례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음복(飮福) 문화가 있으며, 성인이 된다는 의미로 술을 가르친다. 과거 술을 잘 마시는 것을 풍류가 있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고, 근래에 주량은 성공적 사회생활의 척도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술이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때문에 야뉴스적인 야만성도 동시에 갖고 있다. 적당히 마시면 좋지만, 술이 술을 마실 정도로 취하면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광수(狂水)’ 또는 ‘마수(痲水)’로 표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도 그렇고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에도 항상 뒤따르는 것이 술이다.

앞으로도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할 것이다. 평생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주도(酒道)를 제대로 알고 마시는 것이 좋다. 술이 지나쳐 만취하면 인도(人道)가 아닌 구도(狗道ㆍ개의 길)를 걷게 될 수 있다. 오늘 밤에도 정도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보는 것이 건강에 좋을 듯싶다.

박도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