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 붉은 길, 푸르른 마음 (37)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Vacant’
1등석 기내 화장실 위에는 이런 싸인 등이 켜져 있었다. 비어있으니 당장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Vacant 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어있다’는 뜻 이외에도 ‘한가하다’, ‘멍청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연일까? 한가한 척 하는 여자를 꼬여서 그리로 불러들이는 놈은 멍청한 놈이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위선자가 아니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유호성은 가능한 한 몸을 낮춘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떳떳하게 일어서서 걸을 수 없다는 것이 불가사의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저기로?”
강유리는 엠마뉴엘 부인인지, 누군지가 좁은 구석에서 몸을 유연하게 놀리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참지 못하겠는데 어떡해요?”
그럼 그렇지! 멍청한 놈… 강유리는 속으로 이렇게 일갈했다. 유호성은 오래 참았다는 듯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지만 그녀는 늘 주문처럼 반복해서 일러주던 매니저의 가르침을 문득 떠올리는 중이었다.
‘절대 주지 마라. 하지만 주었다면 어김없이 빼앗아라.’
매니저 백광돌이 뼈에 사무치도록 들려준 말이었다. 무엇을 주지 말라고? 몸이다, 몸. 20대 꽃다운 시절을 살아가는 여자의 몸. 어쩔 수 없이 몸을 주게 되었다면 빼앗을 것은? 물론 돈이다, 돈!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던져주고 대가로 사랑 따위나 받아 챙기려는 어수룩한 짓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었지…
‘연봉 2,000만 원 짜리 찌질이에게 주면 네 몸값은 겨우 연봉 200만 원 짜리 싸구려로 전락하는 거야. 왜냐고? 잡아놓은 물고기에게 미끼 주는 거 봤어? 남자들이 제 여자에게 쓰는 돈의 한계는 제 수입의 10%가 고작이라고.’
이를테면 매니저는 유리에게 몸값을 높이라고 충고한 셈이었다. 그의 계산법에 의하면 유리의 젖가슴은 1억 원짜리라고 했다. 그러니 어떤 사내에게 젖을 물리려면 그 사내는 연봉 10억 원을 넘게 버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자, 어서 와요. 잠깐만이라도…”
“미쳤어요? 우리가 영화 주인공예요?”
“우~쒸! 못 참겠대도 그러네.”
비록 소곤거리는 말투였지만 내심으로는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유호성의 얼굴은 열을 받아서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젖을 물리는 데 연봉 10억… 하물며 동침이라도 하려면 최소한 100억을 가진 남자라야만 한다던 매니저의 말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그렇다면 유호성은 일단 합격점에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썩어도 준치… 어쨌거나 재벌 후계자!
“그럼 딱 1분! 승무원들에게 들키면 망신살이 뻗칠 테니 조심해요.”
“알았어요, 찍 소리도 내면 안 되지요. 쥐 죽은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유호성은 살금살금 기내 화장실로 먼저 숨어들었다. 꿀 얻어먹은 곰처럼 엉금엉금, 순순히 기어가는 모습을 보니 웬걸, 그토록 조심스러웠던가? 그는 구두도 신지 않은 맨발차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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