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32
비행기 좌석에 줄지어 앉아 있는 남자 승객들은 저마다 긴장하고 있었지만 강유리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수백명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허벅지로 쏠릴수록 그녀는 의기양양할 뿐이었다. 가끔 휘파람처럼 들려오는 긴 한숨소리에는 사내들의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고, 땡그랑! 땡그랑! 정확하게 와인 잔을 때리는 골프공에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이 그대로 버무려져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 같은데요?”
백광돌이 이렇게 물었다. 물론 속삭이는 말투였다. 강준호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언젠가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 선상에서도 이와 흡사한 골프 묘기를 벌이지 않았던가. 그때엔 고막이 찢어질 듯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게 아니야. 남자들은 지금 최고의 반응을 보이고 있어.”
“그래요?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데도?”
“비행 중이라서 소란 떨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머릿속으로는 진하게 정사 장면을 떠올리는 중이라고.”
“정사 장면? 아하! 베드신.”
하긴 정사 장면을 연상하면서 고함지르거나 박수를 치는 얼간이는 본 적이 없었다. 모름지기 여체의 곡선을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내들은 깊은 무아지경에 빠져들곤 한다. 그러므로 정사 장면이 길어질수록 사내들은 무아…, 즉 현실적인 체면을 버리고 환상의 구름 속을 거닐게 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구름 속을 거니는 것인지, 졸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듯했으나 사실은 저마다 실눈을 뜬 채로 허벅지까지 드러난 강유리의 스커트 자락을 훔쳐보기에 급급했다. 허허실실… 조는 것처럼 실눈 뜨고 보기… 건강하고 미끈하게 드러난 허벅지 속, 농염한 쾌락의 세계를 헤집어 보기.
“유호성… 그 녀석도 회가 동하겠지요?”
“동하겠지. 피끓는 청춘이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재벌 2세 중에서는 제일 미련한 놈이거든? 그저 유리에게 미안스러울 뿐이지.”
“미안스럽긴요?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든 평강 공주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내 딸이 평강 공주라고? 유호성은 바보 온달이고? 그거 말 되네.”
“그렇지요? 말 되지요? 선배.”
강준호와 백광돌이 이렇게 수군거리는 동안에도 비행기 객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와인 잔을 향해 퍼팅하고 있는 강유리는 물론이고 그녀의 퍼팅을 실눈으로 훔쳐보는 모든 남자가 서로 긴장의 끈을 당기고 있었다.
유리는 ‘공의 위치에 따라 스윙을 바꾼다’는 하비 페닉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잡이였으므로 공이 중앙에서 왼쪽에 놓이면 엉덩이의 움직임이 미세하게나마 둔해지게 되고, 반대로 오른쪽에 놓이면 빠른 템포로 공에 덤비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지금은 나와의 싸움일 뿐이야. 유호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그녀는 복도를 덮은 카펫 위에 공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골프는 멘탈게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자신을 다그치는 중이었다. 원래 프로들의 게임에서 그린 위 잔디 길이는 2.5㎜ 정도다. 그에 비해 복도 카펫은 3.5㎜ 정도의 섬유 가닥이 거칠게 결을 이루고 있으니 퍼팅 강도를 세게 해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네 번째 퍼팅을 앞두고 그녀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저 멀리, 비즈니스석에서 유호성이 고개를 삐죽이 옆으로 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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