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16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당당히 꼴찌를 차지하고, 그 지겨웠던 코-드라이버 전진후마저 거성의 그레이스팀에게 빼앗긴 유호성은 사실 어깨 위에 머리통만 달고 다닐 뿐, 생각이라곤 전혀 없이 며칠을 살아낸 것 같았다.
‘내 아들 호성아! 너는 골프 선수가 되어야만 해!’
눈을 감으면 이렇게 눈물겨운 문구가 쓰인 채로 펄럭펄럭 바람에 날리던 플래카드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뿐인가? “오메, 내 아들아!” 하고 고함지르며 신파극을 연출하던 어머니 신희영의 목소리가 마치 이명처럼 귓가에 아련히 퍼지는 것도 같았다.
“미쳤지, 내가 어째서 저런 주책을 떨었을까?”
그는 스키장 게릴라 레이싱 실황을 담아놓은 CD를 툭하면 재생해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던 것이다. 화면 속에서는 골프 선수 강유리와 멋지게 팔짱을 끼고 만세를 부르는 유호성, 즉 본인의 모습이 마치 독립투사처럼 펼쳐져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볼수록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만세 부르는 그 손끝에 깃발처럼 매달려 펄럭이는 플래카드의 문구 때문이었다. 게다가 목이 터지라고 무슨 말인가를 부르짖고 있었는데… ‘나는 위대한 골프 선수가 될 테야!’ 하고 외치는 그 부분은 친절하게도 자막 처리가 되어 화면 하단에 고딕체로 줄줄이 흐르고 있었다.
엊그제까지 랠리카를 몰던 드라이버가 어린 계집애처럼 징징 울면서 골프 선수가 되겠노라고 까불더니 뭐가 어째? 자기가 어째서 그런 주책을 떨었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째서라니… 기자들이 몰려들어 카메라를 들이대니 정신이 나간 탓이겠지.
하지만 명상에 잠기듯 무념무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잡다한 상념들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지며 스르르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또 웬 사달인지… 아무리 깊이 잠에 빠져들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고 되살아나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남우세스럽게도 그 장면에는 늘 탐스러운 젖가슴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A컵과 C컵 젖가슴이 어지럽게 교차되다가 결국 풍만한 C컵 젖가슴으로 귀결되곤 했는데… 잘 알다시피 그 C컵 젖가슴의 주인공은 토플리스 차림으로 슬로프를 활강해 내려오던 신인 골프 선수, 강유리였다.
“미치겠군.”
이 대목에 이르면 유호성은 미칠 것만 같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충동이란 원래가 복잡 무쌍한 것이라서 처음엔 그 원인이 몬테카를로 랠리의 부진한 성적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금 복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게릴라 레이싱에 참가하지 못한 후유증이 겹친 때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미칠 것만 같은 충동의 한복판에 느닷없이 강유리의 자태가 나타나곤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옷 벗은 그녀의 젖가슴만 떠오른다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아직 청춘의 피가 끓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기면 그뿐일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온전한 자태가, 얼굴이, 검은 눈동자가, 낭랑하던 목소리가… 아련히 떠오르곤 했으므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물론 햄릿의 경우에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호성은 랠리를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골프로 돌아서야 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몸이 내키는 대로 하자면 무조건 랠리카를 타고 산으로, 들로 달려나가겠지. 그러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따라가면 어느새 그의 마음은 강유리라는 골프 선수 곁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혹시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중얼중얼… 그는 틈만 나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증상으로 보아 미쳤거나 혹은 짝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몸을 따라가자니 마음이 미쳐가고, 마음을 따라가자니 사방에서 놀림감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높은 양반에게 다그침을 받은 유민 회장만은 아직도 그를 ‘레이서’로 믿고 있었다.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