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바람 부는 길(1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지상 40층 높이,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자리한 VIP룸에서 내려다보는 스키장 정경은 한 폭의 겨울 수묵화 같았다. 물론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옷 벗고 설치는 여자 한 명 때문에 지금은 그 수묵화의 먹물 그림이 빠른 속도로 번져가는 것만 같았다. 통제선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군중들이 우왕좌왕 할 때마다 수묵화 먹그림의 경계가 무너져 구도 자체가 엉망으로 변하곤 했다는 말이다.
“저 여자… 혹시 이스라엘에서 테러를 벌인 아랍 세력의 첩자 아닐까요?”
재벌 2세는 옆자리의 송달민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도종호 상무가 앉아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끓는 가마솥에 담긴 사냥개였다. 한낱 로비스트였던 송달민이 어느새 거성그룹의 전략비서 역할을 하는 실세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게릴라 레이싱을 주최한 목적은 저와 주니어, 그리고 왕 회장님… 오로지 셋만의 비밀입니다. 그런 엄중한 비밀이 새나갔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어째서 레이싱을 방해하는 걸까요? 가만… 거기 쌍안경 좀 줘보세요. 저 여자가 프랭카드를 휘날리면서 내려오네요. 뭔가 확실히 알려야만 할 요구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벌 2세는 마른 침을 삼키며 쌍안경으로 슬로프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두 개의 동그란 원… 쌍안경 속의 세상은 언뜻 동화 속 요정의 나라처럼 신비롭게 펼쳐졌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동화 속 세상을 휘젓는 여자주인공의 자태가 섹시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음! 보통 여자가 아니에요. 비키니를 입은 모습이 평범치 않아, 요염하기 그지없어요. 그런데… 뭐라고?”
“왜 그러십니까? 주니어.”
“뭐가 어쩌고 어째? 경축? 타이거 우즈의 후계자? 강유리가 누구야? 저 헐벗은 여자가 강유리 선수란 말인가? 아니면 기획사 직원일까? 어쨌든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에서 부화 하려는 의도가 뭘까?”
“뻐꾸기? 어느 기획사에서 그런 짓을 하지요? 남의 행사에 빈대 붙어서 자기네 광고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요. 원님 모시려고 깔아놓은 멍석 위에 비루먹은 개 한 마리가 먼저 올라앉았다 이 말입니다.”
이때, 다시 말하자면… 아직 사건의 전모조차 파악하지 못한 재벌 2세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던 그 순간에 스키장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꼭대기로 부터 또 한 명의 여자가 비키니만 걸친 채로 활강을 시작했던 것이다. 유한솜이었다. 그녀 역시 붉고 푸른 연막을 날리며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프랭카드가 휘날리는 것도 앞서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프랭카드에 적힌 구호가 문제였다.
‘악덕 M&A 업자, 유민 회장은 각성하라!’
이를테면 딸이 아버지의 패덕행위를 만천하에 고발하는 자리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사람은 신희영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제 아버지가 미워도 저런 식으로 만천하에 까발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환갑 나이를 훌쩍 넘긴 그녀가 스키를 타고 훨훨 나는 유한솜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쩌랴, 고함이나 지를 수밖에.
“너 이년! 한솜아! 집안망신 그만 시키지 못해?”
신희영은 평소 신던 구두를 신은 그대로 슬로프를 가로지르며 고함쳤다. 발이 눈 속으로 푹 푹 빠졌고 그녀가 밟은 자리마다 눈구덩이가 패이기 시작했다. 이런 구경거리를 어찌 놓칠 소냐. 스키를 신고 산 위에 도열해 있던 촬영기사 한 명이 또다시 대열을 이탈하여 유한솜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그러자 슬슬 눈치를 보던 다른 기사들 서너 명이 우르르! 강유리와 유한솜을을 향해 달려 내려가고야 말았다. 레이싱이야 어찌되든 말든 당장 눈앞에 어른대는 비키니와 풍만한 C컵 가슴, 그리고 앙증맞은 A컵 가슴부터 앵글에 담아보자는 뜻이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