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끝까지, 죽을 때까지 (51)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 어떤 경우로 시작되었든, 중도에 일이 어떻게 꼬였든, 결과만 좋으면 모든 일이 흐뭇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술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여색에 반해서? 어찌 되었든 유민 회장은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카~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여태껏 미로를 헤맨 것만 같소. 이젠 내 어깨에도 날개가 돋아났으니 이 풍진 세상 훨훨 날아 봅시다.”

“날개는 제가 단 셈이지요. 회장님을 만나게 된 순간부터 제 인생은 새로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요.”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아마 전생에서부터 맺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첫 만남에 서로 이토록 가까워질 수가 없다고요.”

방송사 상무와 그의 사촌 여동생, 그리고 유민 회장의 만남은 ‘목적을 전제로 한 필연적 만남’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돈이 필요한 남자와 권력이 필요한 여자가 서로 만났는데, 상대방이 각자의 빈 구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철통같이 믿고 있더라는 말이다.

“이름이 은혜라고 했소? 양 은혜?”

유민 회장은 방송사 상무 사촌 여동생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읊어보았다. 술에 취해서인지 자꾸 외어도 자꾸 잊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차라리 팔백이라고 하면 잊지 않을 것을, 양 팔백… 그녀가 확보하고 있다는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자금이 800억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팔백… 팔백이란 단어만 오락가락 할 따름이었다.

“회장님께선 여당 대선주자와 1주일에 한 번 꼴로 만난다면서요?”

양 은혜는 유민 회장의 질문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제 궁금한 것만 묻기 시작했다. 하긴 대선주자와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다. 유민 회장과는 첫 만남이긴 하지만, 나이 마흔 여덟을 넘긴 슈퍼 골드미스로서 설레는 마음이야 쥐뿔도 없었다. 그녀가 들어서 설렐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여당의 대선주자와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오로지… 여당의… 대·선·주·자!

“아직 젊은 나이에 러시아에서 큰 사업을 벌인다니 대단합니다. 그것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말입니다. 국내 은행에서도 그 가치를 여덟 장 이상으로 매기고 있다면서요? 러시아 은행에서도 가치를 그 만큼이나 쳐 준답니까?”

“회장님이야말로 존경스러워요. 말씀만 잘 하시면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도 떼놓은 당상이라면서요? 얼마나 멋져요? 그 힘! 파워풀한 남자의 힘!”

취했으니 서로의 대답이 들릴 리 만무했다. 아니, 취하지 않았더라도 서로의 대답을 들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환갑을 넘겼거나, 나이 50을 눈앞에 둔 처지였다. 게다가 그들에겐 너무나도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있었으니…

‘으흠… 800억 정도면 5개국 관통 랠리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느긋하게 판을 돌릴 수 있단 말이야. 그 800억 원을 지참금으로 가져온다면 내일 당장에라도 마누라와 이혼하고 당신을 두 번째 마누라로 호적에 올려주겠어.’

아마 유민 회장의 본심은 이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은혜의 본심은?

‘어머나, 눈 질끈 감고 몇 번 만나주면 여당 대선주자와도 끈을 댈 수 있겠지? 그때까지만 참아주자. 대선주자와의 친분설만 이끌어내면 애물단지인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담보로 8억 원 정도는 융자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8억 원만 생긴다면 내 인생길에도 붉은 주단을 깔 수 있을 거야.’

대충 이런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방송사 상무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어째서 자기의 사촌 여동생과 유민 회장이 함께 만나고 있는지 그 까닭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술 때문이었다. 술이 원수지, 그 모든 말을 술김에 횡설수설했던 것이다.

러시아 광산 채굴권을 담보로 800억 원을 융자받을 수 있다는 말, 유민 회장이 여당의 대선주자와 친형제처럼 지낸다는 말도 언제 어떻게 지껄였는지 모를 술주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를테면 지금… 주정뱅이의 뻥에 속아서 그의 사촌 여동생과 유민 회장이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만남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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