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회> 끝까지, 죽을 때까지 39
전무 위에 부사장, 부사장 위에 사장, 사장 위에 오장… 사장보다는 높고, 회장보다는 낮은 끗발인 오장 계급의 재벌 2세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항공특급으로 공수되어 온 모나코 현지 신문부터 찾아들었다. 아버지이긴 했지만 서열이 확고한 회장의 재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더구나 별도의 예산 배정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1974년산 치타를 몬테카를로 랠리에 출전시킨 것에 대한 일종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진으로 도배하면 확실히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하더니… 이게 뭐야? 도종호 상무 어디 있어? 당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하세요.”
재벌 2세는 요즘 며칠간 공식처럼 도종호 상무를 호출하는 것으로부터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1974년산 치타에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의 얼굴모습을 그려 넣자고 한 것은 재벌 2세 본인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재벌 2세쯤 되면 내 잘못도 남의 탓, 남의 잘못 역시 남의 탓으로 돌리기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거 보세요.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야. ‘브리앙 부피에’가 어느 나라 선수요? ‘피터 솔버그’는 또 누구고?”
“부피에 선수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신인인 것 같고요, 피터 솔버그는 조금 낯익은 선수입니다. 아마 지난 2003년에 WRC 챔피언을 먹은 선수일 겁니다.”
“이거 봐요, 무명의 선수도 이렇게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소개되는데 우린 뭐야? 모나코 기자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애들입니까? 자동차 전체를 자기네 나라 왕비 얼굴로 도배를 했는데도 사진 한 장 실어주질 않아? 거 참!”
“현지 기자들 상대로 로비를 하지 않아서 일까요?”
“그런가? 뭐 어디 한 군데 스폰서라도 들러붙었어야 로비를 하지.”
“어디 신문 좀 볼까요? 이 선수들 모두 푸조를 모는군요. 모르긴 해도 푸조에서 엄청나게 로비를 벌인 모양입니다.”
“남 허벅지 긁는 소리 그만하시고… 도종호 상무의 아이디어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걸 반성하세요. 도 상무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1974년산 치타에 그레이스 켈리로 도배를 했으니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사진을 찍어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종호는 기가 막혀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출고된 지 30년이 넘은 고물 차를 출전시킨 것이나, 그 차에 그레이스 켈리의 얼굴모습을 그리자고 한 것이나 모두가 재벌 2세의 아이디어 아니었던가? 그런데 현지 기자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모든 과오를 자기에게 어물쩍 떼어 넘기다니… 하지만 궁하면 통하는 법, 도종호는 즉석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모나코 신문기자 애들이 우리와 정서가 달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만회할 방법은 있습니다.”
“만회? 이제 내일이면 랠리경기가 끝날 판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만회하겠다는 겁니까?”
“비록 라이벌 팀이지만 유민 그룹의 특별지원팀으로 따라간 사람들 중에 제 대학후배가 한 명 있습니다. 그 후배에게 우리 치타가 달리는 모습을 여러 각도로 잘 찍어서 컴퓨터로 전송시키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출발 전에 잠시 의논도 했었거든요. 아마 좋은 사진 몇 장은 확보해 놓은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이벌 팀에서 사진을 전송받아서 어쩌시려고요?”
“현지 신문에서야 어차피 죽 쒀먹은 것이고… 우리나라 신문에 대서특필하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홍보부 직원들을 밤샘이라도 시켜서 폼 나는 기사도 작성토록 하고요…”
“적과의 동침이라! 얼핏 들으면 기발한 생각입니다만… 비밀리에 참가해서 깜짝 쇼를 벌이겠다는 애초 생각부터가 물 건너간 셈이로군요.”
“100프로 만족할 수야 있겠습니까? 깜짝 쇼는 못하더라도 국내 신문에서 며칠간 떠들어 준다면 본전은 뽑는 셈이지요.”
도종호는 이렇게 말하며 재벌 2세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