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끝까지, 죽을 때까지 (23)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권도일과 유호성은 랠리카를 탄 채로 달리고, 신희영과 강준호는 유리벽 안에서 샤워를 하며 달리고, 유민 회장은 방송사 상무와 폭탄주를 들이키며 달리고, 유한솜은 권도일을 짝사랑하며 달리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달리는 중이었지만 유독 강유리와 매니저 백광돌은 맨숭맨숭, 몰두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명색이 골프선수로서 장차 LPGA를 주름 잡아야 할 사람이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니 걱정스럽군.”
“그러게요. 나도 어째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남들은 겨울이 되면 따뜻한 동남아나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전지훈련을 떠나는 판인데 나는 얼음이 서걱거리는 이 산골짜기에서 뭐하자는 짓인지…” 둘은 서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으나 황달 걸린 붕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한심하기만 할 뿐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강유리나 백광돌이나 원님 행차에 뒤 따라다니며 나팔이나 부는 신세였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무한 형편이었다. 그러니 신희영의 눈치만 볼 수밖에 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이렇게 빈둥거려야지 별 수 있나… 왕 회장이 몬테카를로 랠리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무기 장을 칠 게 뻔한 걸.”
“아, 답답해요. 연습을 하루 게을리 하면 나 자신이 알고, 이틀 게을리 하면 상대방 선수가 알고, 사흘 게을리 하면 관중들이 안다고… 누가 그랬더라? 아놀드 파마가 그랬나? 아니면 존 델리?”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말에 담긴 교훈이 중요하지. 자! 이렇게 허송세월만 보내지 말고 나가서 골프연습이나 하지고.”
“어디서 골프연습을 해요? 근처 골프장이라곤 모두 휴장인데… 만약 문을 열었다고 해도 허연 눈밭에서 어떻게 골프를 쳐요?”
“잔소리 말고 그 깡통이나 들고 따라 나와. 웨지도 하나 가져오고.”
마침 강유리는 심심풀이로 복숭아 통조림을 따먹던 중이었다. 하지만 매니저가 그 깡통을 들고 따라 나오라며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 나가니 까닭을 물어볼 틈도 없이 그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과거로 되돌아가면 되지. 내가 처음 골프를 배우던 어린 시절엔 C레이션 깡통과 우산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하게 골프를 쳤으니까.”
“C레이션?”
“아, 유리는 잘 모르겠군. 60년대 초에 월남전이 벌어졌나? 아마 그때 처음 맛본 사람들이 많았을 걸? 파월 미군들에게 배당되었던 전투식량이 C레이션이야. 상자 곽을 열면 국방색 통조림이 잔뜩 들어있었지. 칠면조 고기, 치즈, 땅콩버터… 심지어 담배, 성냥, 가루 커피, 화장지, 이쑤시개까지 빼곡히 들어 있었다고. 물론 맛도 일품이었지.”
“맛있었겠군요. 하지만 내가 궁금해 하는 건 C레이션 깡통으로 어떻게 골프를 쳤는가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깡통을 땅에다 묻고… 우산대로 공을 굴려 넣었단 말이야. 그 당시엔 우산 손잡이가 지팡이처럼 둥글게 굽어진 것이 많았거든? 우산을 거꾸로 들고 후려치면 훌륭한 웨지와 다름없었어.”
백광돌은 허옇게 눈이 덮인 호텔 정원의 한쪽 구석에 통조림 깡통을 파묻더니 정확히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발뒤축으로 금을 긋기 시작했다. 강유리는 그제야 백광돌의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골프란 공을 굴려 구멍에 집어넣는 것. 상황이야 어떠하든 구멍이 생겼고 공이 있으니 골프장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자로 재보진 않았지만 통조림 깡통의 지름도 108mm 쯤 되지 않겠어? 작아도 그만, 커도 그만…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공을 띄워 정확하게 넣어보라고.”
백광돌은 은빛으로 반짝 빛나는 웨지를 건네주며 강유리에게 말했다. 골프장에서만큼은 엄격한 감독이요 코치였으니 사실 그 말은 선수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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