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뇌과학(리사 제노바 지음, 윤승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세 딸의 엄마이자 존경받는 교수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앨리스는 강의 도중 익숙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면 조깅을 하던 중 길을 잃고, 점차 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게 된다. 리사 제노바 하버드대 신경학박사의 동명영화 ‘스틸 앨리스’의 얘기다. 방금 주차한 곳을 잊어버리고, 카드를 손에 쥔 채 찾는가하면 아는 이름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앨리스처럼 알츠하이머 증상일까? 리사 제노바는 기억과 망각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기억의 뇌과학’에서 일상 생활에서의 건망증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뇌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운동 피질 등 다양한 부위에서 경험한 것을 신경 신호로 변환하고 이를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 해마에 저장하는데 외부자극 등으로 이 단계의 과정을 뇌가 충분히 거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일상적인 것보다 특별한 것, 의미있게 여긴 것을 더 쉽게 기억한다. 보스톤마라톤 사건이나 9.11테러 사건처럼 충격이나 슬픔, 공포를 느낀 사건의 경우, 당시 세세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저자는 인간의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저장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으며, 망각은 질병이 아니라 진화에 따른 자연적인 상태라는 점을 강조한다.전문성과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기억에 관한 뇌과학적 이해를 돕는 책은 연구결과와 다양한 임상 사례와 함께 기억력 향상을 위한 실용적 팁까지 제공한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비채)=백인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SF계에서 독보적 입지를 구축한 흑인 여성 작가 버틀러의 우화시리즈의 첫 작품. 1993년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된 데 이어 2020년 다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위력을 과시했다.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2024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30년 전에 쓰였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현실적이다. 기후변화와 경제 위기로 무너진 국가, 노동을 빨아들이는 거대기업과 이방인을 차단하는 장벽 등은 낯설지 않다. 열다섯 살 흑인 여자아이 로런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목사인 아빠와 가족,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 장벽 안 여성들은 실존적 위협에 처해 있다. 장벽 밖 여성에게 강간은 일상이며, 장벽 안 여성은 돈 많은 남성의 소유물처럼 사고 팔리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는 초공감증후군을 앓고 있는 로런은 나이도 어리고 흑인이지만 현실을 타개할 변화를 모색한다.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의 종교를 떠나 변화를 믿는 ‘지구종’을 창시, 자신의 믿음을 글로 기록하고 소수자와 연대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제목에서 보여지듯 버틀러는 성경의 인용과 비유를 적절히 작품 속에 녹여냈다. 변화를 중시하는 지구종 사상은 불교와 비슷한 면이 있고 로런이 쓴 시는 도덕경의 형식을 차용한다. 또한 주인공의 중간 이름도 아프리카 요루바족의 토속신앙에서 따오는 등 풍부한 은유로 버틀러 사유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나그함마디 문서(이규호 옮김, 동연)=‘도마복음’‘요한 비밀의 서’‘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수록된 영지주의 경전, 나그함마디 문서 52편을 모두 수록한 국내 첫 완역판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1600여 년간 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파코미아수도원 항아리에 밀봉된 채 발견됐다. 학자들은 367년 대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문서들에 대한 정죄를 시작함에 따라 이를 피해 묻힌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서 중 대표적인 게 잘 알려진 예수의 어록만을 담고 있는 영지주의 복음서인 ‘도마복음서’, 영지주의의 우주론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요한의 비밀 가르침’ 등이다. 영지주의는 고대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비판 대상으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만 영향력은 이어졌다.이들은 중세까지도 남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서 ‘카타리교’라는 형태로 그리스도교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고 탄압당하고 문서들은 불살라졌다. 그럼에도 강한 생명력으로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는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일원론적이며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신비주의 연구가 이규호씨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책은 저자가 지난해 별세하면서 유고로 남게 됐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앙 전통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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