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보다 영어 발음이 더 분명하고, 그래서 전형적인 엘리트 해외파 스타일에 ‘단 한번도 실패를 맛보지 않은 모범생’ 같은 사람. 많은 이들은 김현종 대한민국 통상교섭본부장을 이렇게 바라본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스스로를 비(非)주류라고 단언한다.
따져보면, 김 본부장은 외교관인 부친(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을 따라 9살때부터 외국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줄곧 동양계 소수 민족의 일원으로 이방인의 삶을 살았고, 고시출신이 주류인 중앙부처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생활을 하고 있으니 비주류이자 아웃사이더로 살고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예사롭지 않은 비주류다. 쉽고 편한 다수의 길을 선택하기 보다 고독하지만 끝내 가야하는 길을 제발로 들어서는 의로움을 지녔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런 야성강한 사고방식과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 스타일이 고도의 통상협상에서 제대로 통했다는 것이다.
김 본부장과 대화를 해 본 이들은 그가 ‘국익, 국격, 국력’이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쓴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국 생활을 해오면서 조국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했던 심정을 “9살때인 1968년 마음 속의 시계가 멈췄다”고 표현할 정도다. 평균 4년마다 9번이나 직장을 옮기며 다양한 곳에서 일해봤지만, 공직에서 국익과 국격을 위해 발로 뛸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수십억원의 연봉이 보장된 대형로펌을 물리치고 통상교섭본부에 몸담은 것도 1960년대 가발 만들어 수출길을 연 여공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참전 용사들, 민주화 운동가들, 중동 건설 근로자들의 피땀어린 노고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통상교섭본부장을 제안했을 때 엄중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그는회상했다.
일각에서는 김 본부장이 학창시절부터 유학생활을 한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군대도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의 오해와 억측을 내놓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본인은 물론 두 아들 역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다했다.
미래세대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김 본부장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본인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시를 따라 과감하게 결정하고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넘어서는 경험을 해 보라”며 “2%미만의 가능성만 있어도 가치 있는 일이면 도전할 것”을 주문했다.
배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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