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동안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무엇일까? 록 브록만이 웹사이트 포럼 엣지에서 세계 지성 110명에게 던진 이 질문의 대답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에서 한꺼번에 읽어볼 수 있다. 비행기, 아스피린, 컴퓨터, 대학, 거울, 배터리, 피임약 등 수많은 위대한 발명품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더글러스 러쉬코프라는 작가가 선택한 것이 가장 엉뚱하고 흥미로웠다.

“답은 지우개다. 컴퓨터의 ‘del’ 키, 수정 화이트, 헌법 수정 조항, 그 밖에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을 꼽고 싶다. 이렇게 뒤로 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적 모델도 없었을 것이고 정부 · 문화 · 도덕도 없을 것이다. 지우개는 우리의 참회소이자, 용서하는 자며,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사실 지우는 개념이 없었다면 인간은 과오에 과오를 더해 더욱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현재 누리는 많은 것들이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실수를 어디까지 수정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수나 과오로 괴로워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어리석은 ‘또 다른 나’를 내면에 숨겨 놓고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거나,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느끼면서 억눌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정말 후회스런 과거를 단숨에 ‘del 키’처럼 지워버리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프랑스의 대학국가고시인 바칼로레아의 철학시험에 “과거가 없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출제 된 적이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살아가기보다 아예 과거를 없애서 인간의 조건을 더 자유롭게 만들고 싶은 유혹적인 사유에 문제를 던진 것이다. 개인의 과거를 없애는 방법은 온전한 망각뿐이다. 자유란 어떤 제약에 대한 인간의 선택이고 보면, 절대적인 망각은 무와 가깝다. 과거가 없으면 자유를 생성할 조건조차 없어지고 만다. 과거와 함께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프로이트식의 ‘과거’에 너무 억압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행동의 총체가 현재의 자신이라고 믿으면서 죄의식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행동에서 반추된 모습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각자의 모습은 현재 진행 중이어서 완전히 알 수 없다. 미래에 만날 선하고 기특한 자신의 모습을 아직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미래의 기획을 위해서는 ‘참회’와 ‘용서’의 용광로가 필요할 것이다. 이때 과거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굴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한 기획을 발효시킬 좋은 효소로 사용될 수 있다. 나쁜 기억이 현재와 미래를 함부로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선한 의지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까지 재구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야말로 각 개인의 자유의지의 힘일 것이다. 뒤로 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면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개인적 욕심으로는, 인간의 귀중한 발명품 중의 하나로 미래 속에서 과거의 잘못된 행동의 의미를 수정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포함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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