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연출, 최민식·한소희 영화 ‘인턴’
원작의 따뜻함에 한국식 오피스 정서 더해
속도의 시대, 되돌아보는 ‘사람’의 가치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37년간 지도를 만드는 출판사에 몸담았던 기호(최민식 분)는 은퇴 후 홀로 조용히 인생 2막을 살아간다. 그의 일상은 소소하다. 일찍 곁을 떠난 아내의 사진 앞에 생전 그가 좋아했던 꽃을 한 아름 꽂아놓고, 카페에 앉아 잠시나마 세상의 분주함을 곁에서 지켜보는 정도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던 중, 기호는 패션 브랜드 ‘WOO22’(우투투)에서 ‘실버인턴’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된다. 광고 속 무언가에 이끌린 듯, 그는 고민 없이 인턴의 삶에 지원한다. “저의 강점은 경험이 많다는 것이고, 저의 단점은 나이도 많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준비성, 군더더기 없는 답변. 면접까지도 순조롭게 마친 그는 ‘우투투’의 실버인턴에 합격한다. 세월이 묻은 정갈한 양복, 오랜 세월 함께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 기호는 그렇게 창업 3년 만에 100억대 매출을 달성한 유망한 패션 기업의 한가운데에 ‘인턴’으로 발을 딛는다.
분주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무실에서도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최고경영자(CEO)인 선우(한소희 분)다. 분 단위로 쪼개진 일과를 소화하며 살아가는 그는 ‘우투투’를 패션업계의 다크호스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나이로는 1등, 서열로는 막내가 된 우투투의 인턴 기호는 열정으로 가득 찬 CEO의 직속 비서로 배정받지만, 어떤 어른과도 친해진 적 없는 선우는 그런 기호의 존재가 불편하기만 하다.
평생 일을 하며 몸에 밴 성실함은 기호의 일상 곳곳에 묻어난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직장이지만, 그는 제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고, 늘 가장 먼저 사무실의 불을 켠다. 하지만 선우도, 직속 상사인 민아(류혜영 분)도 기호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도통 울리지 않는 메신저 앞에 며칠을 덩그러니 앉아 있던 기호. 그는 자신의 근면함과 연륜을 텅 빈 책상 위에서 허비하지 않는다. 사무실 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는 여유를 얻은 그는, 앞만 보고 질주하느라 미처 보살피지 못한 사무실 곳곳을 살핀다. 어지럽게 쌓인 샘플 무덤, 오랫동안 방치된 창고는 기호에 의해 제 모습을 찾고, 그런 기호를 보며 선우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지난 한 남자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쉼 없이 달리는 한 여자는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며 서로 다른 시선과 경험을 나눈다. 오는 16일 개봉을 앞둔 영화 ‘인턴’이다.
‘82년생 김지영’, ‘만약에 우리’의 김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민식과 한소희가 주연한 영화 ‘인턴’은 2015년 개봉한 동명 할리우드 영화를 한국식으로 새롭게 빚어낸 작품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그려낸 ‘벤’과 ‘줄스’는 이번엔 ‘기호’와 ‘선우’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2026년 한국의 정서를 담아 스크린에 돌아왔다. 온라인 쇼핑이 ‘첨단’이었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AI)의 시대에 우리 곁에 다시 당도한 ‘인턴’은, 멈출 수 없는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찾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변치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인간미 넘치는 ‘오피스 코미디’의 정서를 온전히 계승하면서도, 한국식 오피스 문화 특유의 정서를 섬세하게 녹여낸다. 이른바 MZ(밀레니얼+Z)로 가득 찬 ‘우투투’에서 나이 많은 인턴은 존재만으로도 낯설고 불편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갈등으로 연결하기보다, 서로 다른 세대가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하는 계기로 그려낸다.
기호가 사무실 구석구석을 정돈하고 방치된 창고를 손보는 과정도 그렇다. 영화는 원작 속 어질러진 책상을, 옷으로 뒤덮여버린 소파로 바꿔놓는다. 속도와 효율만을 좇던 조직 속에서 파묻혀버린 유일무이한 휴식의 공간은 기호의 손에 의해 되살아난다. 일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기호가 만들어낸 여백은 다시 직원들의 쉼의 공간이 되어, 휴식과 소통이라는 여유를 만든다. 그렇게 날아갈 듯 달리는 우투투의 시간은, 유독 기호의 곁에서만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영화가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시야다. 원작이 벤과 줄스의 관계, 그 안에 녹아든 오랜 연륜과 뜨거운 열정을 그렸다면, 김도영 감독이 해석한 ‘인턴’은 그 시선을 ‘우투투’ 전체로 확장한다. 선우가 자신의 감을 믿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회사를 이끌어가는 동안,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영화는 잊지 않는다.
그 안에는 팀장에게 성과를 뺏기고도 시원하게 뒷담화 한 번 못 한 채, 산더미 같은 일에 다시 떠밀리는 직장인의 애환이 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상사의 칭찬 한마디에 순식간에 마음이 누그러드는 ‘K-직장인’의 마음도 있다. 쓸모를 인정받으며 거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적인 우리의 삶. 영화는 그 얼굴을 가만히 비추며 왠지 모를 위안을 안긴다. 열정을 불 피우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도, 힘듦 속에서도 끝내 해내는 것은 AI(인공지능)가 아닌 사람이다.
최민식과 한소희의 시너지도 기대 이상이다. 오랜만에 ‘편안한’ 얼굴로 돌아온 최민식은, ‘한국의 드니로’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게 ‘기호’란 캐릭터를 자연스레 소화한다. 무심하게 팔에 착용한 팔토시며, 쑥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는 오란다까지. 세심하게 준비된 아이템들과 어우러진 그는 ‘한국형 아저씨’를 완벽하게 그려내며, ‘벤’과는 닮은 듯 다른 익숙한 온기를 뿜어낸다.
한소희 역시 냉철한 카리스마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선우라는 인물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완벽해 보이는 성공 신화 이면에 감춰진 불안과 고단함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과장 없는 눈빛과 호흡이다. 마치 어느 장르물의 캐스트를 연상시키는 두 배우는, 각자 새롭게 완성한 캐릭터로 세대와 성별을 넘나드는 잔잔하지만 단단한 호흡을 만들어낸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경험’과 ‘연륜’의 가치라는 메시지는, 원작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AI가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 가는 요즘, 영화는 효율과 속도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인간관계의 가치와,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만들어가는 신뢰의 무게를 조용히 되짚는다.
일생동안 열심히 채워 넣은 인생의 캐리어를, 기꺼이 다음 세대를 위해 풀어놓는 인생 선배가 있다. 그런 그의 노력을 지나치지 않는 인생 후배가 있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이들의 다정한 자세가 있다. 화려한 반전이나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세월이 알려준 기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일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여운, 영화 ‘인턴’이 관객에게 전하는 힘이다. 1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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